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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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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흔드는 중국 '두리안 외교'..."수출 길 열 테니 내 말 들어!" [아세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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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치 압박 카드 된 ‘과일의 제왕’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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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베트남 동나이성 탄푸 지역 인근 한 전통시장에 두리안이 진열돼 있다. 탄푸(베트남)=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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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 탄푸 지역의 한 두리안 농장. 섭씨 35도 뙤약볕 아래 농민 6명이 숨 돌릴 틈 없이 두리안 나무에 핀 꽃과 열매를 다듬고 있었다.

주렁주렁 열린 어린이 머리 크기 열매 사이로 아기 주먹만 한 작은 열매가 보이자 농장 주인 응우옌반티(60)가 전정가위를 밀어 넣어 재빨리 잘라냈다. 수확을 3주가량 앞두고 마지막 숙성이 필요한데 자칫 새로 난 열매가 기존 열매의 영양분을 빼앗아 갈 수 있는 탓이다.

티는 2016년부터 10헥타르(㏊·약 10만㎡) 크기의 이 농장에서 두리안 나무 700여 그루를 키우고 있다. 베트남 동남부 지역 주요 상수원인 동나이강 상류에 있는 데다 1년 내내 덥고 건조한 기후여서 대체적으로 작황이 좋은 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크게 잘 자란 두리안 열매는 껍질을 포함한 무게가 약 7, 8㎏에 달한다. 나무 한 그루당 20~35개 열매를 수확하는 점을 감안하면 2만 개 안팎의 과실을 얻는 셈이다.

티가 수확한 두리안 대부분은 중간 수출 업체를 통해 중국으로 향한다. 그가 기업에 도매로 파는 가격은 ㎏당 약 6만5,000동(약 3,600원) 수준. 업체는 이를 ㎏당 약 15만 동(약 8,300원)에 중국으로 넘긴다. 중국 마트에서는 ㎏당 20~30만 동(약 1만1,000~1만6,000원)에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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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베트남 동나이성 탄푸의 한 두리안 농장에서 직원이 나무에 매달린 두리안을 살펴보고 있다. 탄푸(베트남)=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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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두리안이 중국 식탁에 오른 세월은 길지 않다. 지난해 7월 중국이 베트남산 두리안을 처음 수입 품목으로 인정하기 전까지 주요 판매처는 호찌민을 비롯한 인근 베트남 도시였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

티는 “시기에 따라 가격 변동이 조금 있지만 중국에 제품을 수출한 이후 전(㎏당 약 4만 동)보다 더 높은 값을 받게 돼 수입이 늘었다”고 했다. 이어 “수출입 기관과 세관의 까다로운 검사를 통과해야 수출 자격을 받을 수 있다"면서 "컨테이너 1개에서 두리안 5개를 무작위로 선정해 검사하는데, 하나라도 진딧물이 있거나 썩은 작물이 발견되면 전체 수출 길이 막힌다”고 설명했다.

큰손 중국에 바뀐 동남아 농업 판도


‘천국의 맛, 지옥의 냄새’로 불리는 열대과일 두리안이 동남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다. 두리안은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과일이다. 뒷걸음질 쳐질 정도로 고약한 첫 냄새 탓이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다”거나 “시궁창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악취가 멀리까지 퍼지는 데다 냄새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탓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대중교통이나 호텔로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노란 과육을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한 맛이 퍼진다. 식감도 버터같이 부드럽다. 한 번 맛을 보면 헤어 나오지 못하기에 베트남에는 "두리안에 미치면 집도 팔고 배우자도 판다"는 속담이 있다. 두리안을 ‘악마의 과일’이자 ‘과일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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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태국 방콕의 지하철역에 두리안 반입을 금지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방콕=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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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14억인 중국은 동남아시아 두리안의 큰손이다. 중국 농업 당국이 자체 재배를 연구하고 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아직 큰 성과가 없다. 중국은 그간 두리아 수요 대부분을 태국에서 조달해 왔다.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자 지난해 7월과 올해 1월부터 각각 베트남과 필리핀에도 수출 문을 개방했다.

지난해 중국이 사들인 두리안은 82만 톤에 달한다. 금액으로는 총 40억3,000만 달러(약 5조3,647억 원)다. 수입 과일 중 부동의 1위로, 2017년(22만 톤)보다 수입량이 4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두리안 총수출량이 205만 톤인 점을 감안하면 40%를 중국이 쓸어 담은 셈이다.

다른 농작물 갈아엎고 두리안 재배


중국의 두리안 사랑은 동남아시아 국가 농업 판도를 바꿨다. 2021년 태국상공회의소대학(UTCC) 국제무역연구센터는 2011년 이후 태국 두리안 재배 농토가 6배 늘었고, 동부 지역 농민 80%가 고무나무를 없애고 두리안을 재배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돈’이 되는 두리안나무를 심기 위해 업종 변경을 불사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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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베트남 동나이성 탄푸에서 두리안 농장 직원들이 수확한 과일을 트럭에 옮기고 있다. 탄푸(베트남)=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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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정도 다르지 않다. 너도나도 농경지를 갈아엎고 두리안 생산에 나섰다. 탄푸 지역에서 만난 또 다른 농장 주인 즈엉반딘(31)은 “원래 잭프루트(열대 과일의 일종)와 아보카도 농사를 지었지만 해외에서 두리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소식을 듣고 2020년부터 재배 종을 일부 바꿨다”며 “묘목 한 그루당 10~15만 동씩 총 160그루를 심었다”라고 설명했다.

뒤늦게 중국 시장에 뛰어든 필리핀도 적극적이다. 필리핀 두리안 수입업체 돌차이나 관계자는 “수요가 워낙 많아 운송비가 비싼 항공으로도 수입하고 있다”며 “필리핀 두리안 가격은 태국이나 베트남산에 비해 저렴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 회사는 연간 2,000톤의 필리핀 두리안을 중국에 수입할 예정이다.

의존도 높아지면 中 입김에 휘청


‘수출 활로 확보’는 국가 경제에 호재다. 그러나 베트남과 필리핀 정부는 마냥 웃지 못한다.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시진핑 정권의 압박과 입김을 무시하기 어려워지는 탓이다.

과일 수입을 금지한다고 중국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안 먹으면 그만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중국 시장만 바라보는 농민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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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대만산 파인애플 수출을 금지한 2021년 3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타이베이에서 내수 소비 활성화를 촉구하고 있다. 타이베이=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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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두리안 수입을 지렛대 삼아 동남아시아 국가를 쥐락펴락할 위험도 크다. 이미 전례도 있다. 2021년 초까지 중국은 대만산 파인애플 수입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였지만, 같은 해 3월 돌연 수입을 중단했다. “대만 파인애플에서 유해 물질이 나왔다”는 게 중국 주장이었지만, 당시 미중 갈등과 양안(중국과 대만) 갈등이 거세지는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게다가 파인애플이 주로 재배되는 가오슝, 핑둥 등 대만 남부 지역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주진보당 지지기반이 두터운 곳이었다. 중국의 수입 중단 이후 대만 파인애플 시장은 크게 흔들렸다. 2020년 생산량의 91.2%에 달했던 대중국 파인애플 수출이 2021년에는 3.1%로 곤두박질쳤다. 동남아시아의 두리안이 언제든 ‘제2의 대만 파인애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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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베트남 동나이성 탄푸 지역의 한 전통시장에서 상인이 두리안을 반으로 갈라 과육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 탄푸(베트남)=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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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베트남과 필리핀에 두리안 수입 문을 열어준 시점도 미묘하다. 지난해 5월 베트남은 미국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참여를 결정했다. 중국의 베트남산 농산물 수입 결정은 그로부터 두 달 뒤 나왔다. 필리핀의 수출 허가 역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취임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노골적인 친미 행보를 보인 지 넉 달 만에 나왔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아세안) 핵심 국가들이 미국과 손잡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이 당근책을 꺼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른바 ‘두리안 외교(Durian diplomacy)’다. 그러나 ‘당근’은 언제든 상대국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카드이자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채찍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싱가포르 싱크탱크 ISEAS-이샤크 연구소 르홍힙 연구원은 “중국에 상품을 팔면 팔수록 베트남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해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이 국경 무역을 전략적 영향력 행사 도구로 활용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메콩 델타 지역 전문가인 레안투안 껀터대 교수는 “중국에 대한 수출량이 증가할수록 중국 의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중국 이외 다른 수출 활로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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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물_허경주의 아세안 속으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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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푸(베트남)·방콕(태국)=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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