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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정동칼럼] 진실이 떨어질 때 까마귀야 날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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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위험성 문제를 지적하자 또다시 ‘음모론’이라는 비판이 등장했다. 정권에 대한 ‘발목잡기’가 아니냐는 비난도 뒤따르고 있다. 진실을 향한 열의와 사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가짜뉴스와 혐오 발언 앞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과거 공정한 공론장 위에서 진위를 다툴 때 거짓 선동과 혐오 발언은 쉽게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그 공론장이 스마트폰 안에서 디지털 정보로 대체된 오늘 상황은 많이 바뀐 듯하다. 나는 부모님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단체 대화방 알림음 소리가 어떤 동영상을 공유한 것인지 이제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그 소리가 잦아들면서부터 나 또한 부모님에게 음모론자가 되어 있었다.

대량의 가짜뉴스가 디지털 생태계에 확산되면 이내 본질은 흐려지고 진실은 곧 묻히고 만다. 여기서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흩어지고 가려진 사실들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지 않을까. 1980년대 인류학 분야에서는 ‘부분적 진실’이라는 성찰적 논의가 진행됐다. 서구 백인의 인류학자가 제한된 기간에 한정된 인원의 비서구인을 관찰한 것이 온전한 진실이라 말할 수 없다는 반성이었다.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사실들이 너무 많고, 설령 사실을 목격했다 해도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왜곡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성찰적 열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음모론 논쟁의 핵심은 진실의 부분성이 아니라 ‘진실성’ 그 자체에 있다. 즉 가짜뉴스와 혐오 발언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를 공격한다. 진위는 그다음 문제다. 그것은 결국 끝까지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열의,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정치 전반에 대한 혐오와 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기득권의 승리가 보장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 한병철은 이렇게 진실에 대한 열망이 사라질 때 곧 민주주의의 위기가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까마귀는 아주 쉽게 배를 떨어뜨린 범인이 될 수 있다. 설령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선후 인과관계가 없다 해도 그저 상관관계만 있으면 충분히 진짜 원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저 배가 떨어질 때 까마귀가 날아갔다고 힘껏 디지털 사이렌을 울려퍼지게 하면 된다.

과거 진실에 대한 열의가 공동체 안에서 지켜질 때만 해도 그 둘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밝히는 데 조금은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사회는 이른바 ‘인포데믹’(Information과 epidemic의 합성어)’의 시대다. 한 마리의 변종 까마귀가 바이러스처럼 네트워크망을 통해 순식간에 확산될 수 있다. 심지어 온라인상에서 악성 댓글 바이러스들을 조합해 혼종 디지털 까마귀를 만들어 유포하는 ‘사이버렉카’(cyber-wrecker)까지 활보하고 있지 않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의혹은 합리적 의심으로 굳어지게 되고 진실성에 대한 열의는 폐기처분된다. 한편, 진실성 자체를 훼손하는 변종 까마귀는 일종의 사실들로 뒤엉킨 ‘매듭을 잘라내는 오류’이기도 하다. 일명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함?)’ 까마귀다. 엉킨 매듭을 풀자는 진위 주장은 그 매듭 자체를 잘라서 버리는 것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소위 ‘절싫중떠(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와도 같은 말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개인의 모든 행동이 빅데이터 분석에 활용되는 극단적 정보과잉의 시대가 민주주의에 근본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빅데이터의 ‘신적인’ 시야 앞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열정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민주적 논의보다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인간의 행동주의적 정보가 신속하고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한병철은 이를 “데이터 주도의 인포크라시(Info-cracy)”라 부른다. 이것의 핵심은 ‘왜 그런가’라는 질문이 이제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즉,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라는 지적이다.

상관관계가 지배한 삶이란 삶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왜는 삶에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이유는 모두가 그렇게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빅데이터의 결과면 충분하다. 인포데믹 시대에 다수의 변종 까마귀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말 이제 누군가 진실을 말할 때 시선을 빼앗는 까마귀가 날지 않기만을 기도해야만 하는 것일까.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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