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푸틴의 동원령 이후 탈출 행렬 거세져
교육받은 고숙련 노동자들 이탈에 "러 생산성 계속 떨어질 것"
지난해 9월 러시아 동원령 이후 조지아로 넘어가는 이들. |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러시아 시골 마을 출신인 30대 초반의 스베틀라나는 18세에 수도 모스크바로 상경해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회사를 거치며 제품 관리자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삶은 즐거웠고, 이대로 이곳에서 은퇴할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은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전쟁이 곧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전쟁에 항의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떠나는 것이 맞는다고 느꼈다"고 영국 BBC 방송에 털어놨다.
"러시아를 떠나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그는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다. 그는 "당국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한다.
BBC는 4일(현지시간) 지난해 전쟁 발발 이후 스베틀라나와 같이 러시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 이들이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수백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첫 번째 탈출 행렬은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4월에 시작됐다. 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나 러시아 내 미미한 반전 움직임에 실망한 이들이 고국을 떠났다.
망명 흐름은 지난해 9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군 동원령을 전격 발표한 뒤 더 거세졌다.
강제 징집을 피하려는 남성과 그 가족들이 대거 망명길에 오르면서 조지아나 카자흐스탄행 국경에는 며칠 동안 긴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난달 영국 국방부는 작년 한 해 130만명이 러시아를 떠난 것으로 추산했다. 포브스지 역시 러시아 당국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작년에만 60만∼100만명이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9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동원령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체포되는 시민. |
그렇다면 이 많은 러시아 망명자는 어디로 갔을까.
BBC는 지난 15개월 동안 약 15만 5천명의 러시아인이 유럽연합(EU) 회원국이나 발칸반도, 코카서스,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임시 거주 허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망명청(EUAA)에 따르면 유럽연합 회원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이들도 약 1만7천명에 달한다. 코로나19 발발 이전인 2020년 초 수준의 3배가량이다. 다만 이들 중 망명 승인을 받은 사람은 2천여명에 불과하다.
EU 회원국이나 미국의 경우 전쟁 발발 후 한동안은 자국에 이미 가족이 있거나 업무 용건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비자를 신청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카자흐스탄 등 일부 국가는 올해 초 법을 바꿔 관광 목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을 제한해 러시아 이민자 유입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조지아나 아르메니아 등 일부 친러 국가는 러시아인들의 왕래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국경을 열어두고 있다.
망명자 대부분은 50세 미만이며, IT 전문가, 언론인, 디자이너, 예술가, 학자, 변호사, 의사 등 다양한 직군에서 활동하던 이들이다.
러시아 이민 현황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이들 상당수가 러시아에 남은 이들보다 젊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대도시 출신이라고 보고 있다.
러시아 난민 가운데에는 성소수자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토마스는 "저는 평화주의자로서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 파병되는 게 두려웠다"면서 "특히 동성애 선전 금지 강화법이 통과된 이후 제 생명과 자유에 대한 위협이 커졌다는 걸 알았다"고 BBC에 말했다. 스웨덴에 난민 신청을 한 그는 승인 거절에 불복해 이의제기 절차를 밟고 있다.
BBC는 수십만 명의 교육받은 부유한 사람이 돈과 함께 고국을 떠나는 것이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최대 민간 은행인 알파 은행은 러시아 전체 노동력의 1.5%가 러시아를 떠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대부분은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이라 러시아 기업들이 인력 부족과 구인난을 호소하고 있다고 BBC는 보도했다.
러시아 중앙은행도 전쟁 초기 러시아인들이 계좌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인 1조2천억루블(한화 약 19조6천억원)을 인출했다고 보고했다.
러시아 국립과학아카데미의 경제학자 세르게이 스미르노프는 BBC에 "이런 추세로 볼 때 고숙련자들이 계속해서 러시아를 떠날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며 "종말론적인 시나리오를 좋아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 경제 생산성은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열병식서 연설하는 푸틴 |
sa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