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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사유와 성찰] 산사에서 맞는 엔데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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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대로변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외국인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연등 행렬에 동참한다. 거리에 활기가 넘쳐나고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인사를 나누면서 걸어간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새롭게만 느껴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경향신문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지난 4년간 중단되었던 연등 행렬을 다시 보니 새롭고도 반갑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하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은 허무하다거나 덧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사가 잘 풀려가거나 잘 나아갈 때는 그 기쁨과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불행한 일들이 닥쳐오고 인생의 고비를 맞게 되면서 고통과 좌절을 겪게 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이 영원할 수 없고 변한다는 진리이다. 그러니 일이 좀 잘 풀린다고 교만해질 것도, 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비굴해질 필요도 없다. 최근 마스크를 벗고 빠른 속도로 일상이 회복되어 가면서 그간 우리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에 대해 그만큼의 속도로 쉽사리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정부는 지난 1일을 기점으로 위기 경보 수준을 ‘심각’에서 ‘경계’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이제 마스크 착용 의무가 의원, 약국까지도 전면 해제됐다. 확진자의 격리 의무도 해제됐다. 이미 세계보건기구(WHO)도 국제 공중보건 위기 상황 선언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오랜만에 WHO 홈페이지를 방문해 통계를 확인해 보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사망자 수가 693만5889명(2023년 5월22일 기준)에 이른다. 700만명에 가까운 막대한 희생자 수다. 현재는 사망률이 줄어들긴 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어둠 속의 긴 터널을 이제 막 빠져나온 정도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기차를 탔다. 이전엔 오갈 때 항상 마스크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답답한 느낌이었는데, 간만에 마스크를 벗고 좌석에 앉아 있으니, 시원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만에 맛보는 편안함인지를 느끼고, 또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인데 마스크 하나 쓰지 않는 것으로도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한 채 자리에 앉아 있는 몇몇 분들의 모습이 모두가 겪은 지난 시간의 아픔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절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인사만 하더라도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초기부터 산문 폐쇄를 단행했고, 산문 밖 출입이 전면 중단되는 초유의 일이 생기기도 했다. 여름과 겨울에 하는 안거 수행 시기가 연기되기도 했다. 스님들은 예불 시간에도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법당에서 염불과 독송을 해야 했으니, 소리가 제대로 울려 퍼질 리 만무했다. 그래서인지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진행된 연등 행렬이 유달리 새롭고 반가웠다. 무려 4년 만에 다시 화려한 연등이 전국 각지의 도심을 환히 밝힌 것이다.

사람들은 선선한 봄날 저녁에 밤하늘을 형형색색으로 수놓은 다양한 연등을 보면서 저마다 소원을 빌고, 흥에 취해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들뜬 마음으로 제각각 다시 찾아온 축제와 소중한 일상을 만끽하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를 잃기도 하고, 직장을 잃거나, 꿈을 접어야 하는 강요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그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다시 밝은 태양 빛 속에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금 행복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하안거 준비 방학을 마치고 하안거 결제를 위해 전국 각지에 흩어졌던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해인사로 다시 돌아왔다. 다들 마스크를 벗고 목청껏 염불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차서 법당이 쩌렁쩌렁 울린다.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조차 지탱해 나가기 버거운 시절이 있었기에 다시 돌아온 일상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가고 있다. 모두 다 고통스러웠고,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고 결국 해냈다. 특히 그간 수고 많았던 간호사님들과 의사를 비롯한 의료종사자들, 자원봉사자들, 모두에게 감사와 위로를 보낸다. 내가 당연한 듯 누리는 이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게 만들어 준 인연들을 위해 손을 모아 기도한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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