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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분신 사망 한 달…“모두가 저녁이 있는 삶 살았으면” 했던 노동자가 삶을 등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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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양회동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이 정부의 건폭몰이 수사에 항의하며 분신한 지 1일로 한 달이 흘렀다. 지난 한 달간 노동·시민사회계에서는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양 지대장의 분신을 동료 조합원이 방조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했고, 월간조선은 양 지대장 유서 위조 의혹을 제기했다가 오보로 판명 나 사과했다. 이후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은 노조에 대한 강경대응 기조를 이어갔고, 경찰은 즉각 호응에 나섰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시민 불편을 초래하는 집회는 불법”이라며 엄단 기조를 천명한 직후, 6년 만에 경찰의 불법집회 해산 훈련이 실시됐고 캡사이신 분사기도 집회 현장에 투입됐다. 이 모든 것이 한 달 사이 벌어진 일이다.

경향신문은 양 지대장과 가까이 지내던 이들을 통해 그의 삶을 전해 들었다. 동료들은 그를 ‘순한 사람’ ‘익살맞은 형’ ‘헌신적이던 지대장’으로 기억했다. “먹고 살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그가 분신에 이르기까지 약 4년. 그 시간을 되짚었다.

불법재하도급 만연한 건설 현장에서 생계 꾸리기 위해 노조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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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분신해 숨진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지대장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조문을 마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성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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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지대장은 노조에 가입하기 전 철근공으로 8년가량 일했다. 손재주가 좋아 현장에서 3년 만에 반장을 맡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평균 고용 기간이 2~3개월에 불과한 건설 현장에서 쉬지 않고 일감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2019년 10월 노조에 가입했다.

대형 건설 현장에선 ‘오야지’로 불리는 업자들의 중간착취가 만연했다. 이들에게 임금 10%를 떼이지 않으려고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했다. 휴일근로수당, 유급휴가 등도 노조에 들어와서야 보장받는 경우가 많았다. 김현웅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사무국장은 “불법 재하도급에 시달린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노조를 찾는 경우가 많다”며 “양 지대장도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양 지대장은 2022년 1월 강원건설노조 3지대장을 맡았다. 노조원들의 현장 일감을 따오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통상 3~5년 정도 지나야 할 수 있는 지대장 업무를 일찍 맡은 축에 속했다. 노조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상경투쟁 집회가 있는 날에는 1시간 전 집회 현장에 도착해 무대를 준비했다고 한다. 김 사무국장은 “(집회에서도) 분위기를 즐겁게 하려 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2022년 1월 40여명 남짓이던 강원건설지부 3지대 노조원은 지난달 약 150명까지 늘었다. 박석용 강원건설지부 조직부장은 “양 지대장이 지역 구석구석에 있는 현장까지 찾은 덕분”이라며 “양 지대장은 성격이 유들유들하고 말이 잘 통해 노사 간 징검다리 역할을 잘한다며 현장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경찰 ‘건폭몰이’ 이후 수백㎞ 달려도 현장 관리자 못 만나…수사 본격화 이후 어려움 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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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양회동 열사투쟁 노동시민사회종교단체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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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지대장은 평소 주변에 “조합원들 모두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의 바람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이 본격화한 지난해 12월부터였다. 경찰은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현장 사무실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녹음기를 켜고 교섭을 해야 했다. 노정 갈등이 심해질 때도 양 지대장은 “정부가 어느 정도 겁을 주다가 결국 노사와 상생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라며 동료들을 달랬다고 한다.

양 지대장은 주 5~6일 300㎞ 이상 차를 몰아 속초·고성·양양을 거점으로 돌며 현장 교섭을 시도했다. 건폭몰이가 거세질수록 현장에 가도 현장 관리자를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늘었다. 주변 이들은 “양 지대장이 관리자 없는 현장만 둘러보다 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현장 관리자들이 대놓고 “민주노총은 채용 못 한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양 지대장은 한 현장을 여섯 번씩 반복해 찾아가면서 조합원 채용을 읍소할 정도로 애를 썼다고 한다. 경찰이 양 지대장이 거쳐 간 현장을 방문해 채용강요가 없었는지 물을 때도 동료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박 조직부장은 “속이 탈 법도 한데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더라”며 “현장을 돌 때 만나면 늘 ‘잠은 잘 주무셨나’ 웃으며 말을 건넸다”고 했다.

지난 3월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공갈·협박으로 8000만원을 갈취한 혐의를 양 지대장에게 적용했다. 이귀상 강원건설지부 3지대 형틀팀장은 “처음에 자정이 넘어서까지 조사를 받았다길래 ‘형이 내가 모르는 무슨 잘못을 했나’ 싶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채용 과정에서 교섭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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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노동절에 분신을 시도해 사망한 전국건설노동조합 고 양회동 지대장을 추모하고 건솔노동조합을 지지하는 24개 청년학생단체 회원들이 1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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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지대장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평소 어울리던 당구 동호회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요청했다. 양 지대장을 비롯해 경찰 수사를 받은 노조 간부 3명 앞으로 5000여장의 온라인 탄원서가 모였다. 현장 소장들도 “(강요를 할)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탄원서를 써냈다.

검찰은 지난 4월26일 공동공갈 등 혐의로 양 지대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팀장은 “최근 만났을 때는 농담도 별로 안하고 표정이 수척해 보였다. 같이 술을 마시다 나한테 ‘형님, 요즘 힘들어요’ 하고 푸념하곤 했다”고 했다. 결국 양 지대장은 노동절인 지난달 1일 오전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박 조직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말하고 분신했다.

남은 이들은 양 지대장이 떠난 뒤 강원 지역 노조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했다. 교섭차 현장을 찾아도 “민주노총은 못 뽑는다. 노조 조끼 벗고 들어오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은 아직 공석이다. 강원건설지부 3지대 150명의 조합원 중 노조 차원의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30여명 뿐이다. 박 조직부장은 “많은 조합원들이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떠났다. 남은 사람들도 앞으로 어떻게 노조 활동을 해나가야 할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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