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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공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생활동반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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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어떤 분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 물어보셨다. 나는 등록하시려는 줄 알고, “네, 저희 의료기관에서도 등록은 가능하신데요, 건강보험공단과 보건소처럼 공공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원하는 때 언제든 등록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자원활동가들이 시간을 내주시는 때에 맞춰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도와드릴까요?”라고 여쭤봤다.

경향신문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가정의학과 전문의


그분은 이미 보건소에서 몇 년 전에 등록을 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신 건 최근에 돌아가신 지인의 임종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문득 저렇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다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제대로 작동할지 궁금하여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매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카드’를 보여드렸다. 너무 불안하면 이거라도 지갑에 넣고 다니세요, 저처럼. 그리고 미리 가족들, 자녀들에게도 다 말씀해 놓으시고요.

친구의 고양이가 갑작스러운 장 파열로 패혈증이 와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다. CT를 찍고 장 파열의 원인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친구는 보호자로서 고양이의 수술동의서를 쓰면서 심폐소생술은 거부한다는 서약서에도 사인했다. 친구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고양이는 이미 복강 내로 진행된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고, 그 암으로 장이 파열돼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해도 암의 완치는커녕 앞으로 기나긴 항암치료가 남은 터였다. 그러니 수술 중 혹은 수술 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더 이상 고양이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심폐소생술 거부 서약서를 쓴 것이었다.

다음날 수술 후 회복실로 옮겨진 고양이의 생체징후가 약해져가던 새벽에, 친구의 심폐소생술 거부 서약서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야간 당직을 서던 수의사가 당연한 것처럼 심폐소생술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소생술이었다.

또 다른 친구의 외할머니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장 파열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실에 계시다 요양병원으로 옮기며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상태였다. 가족들 모두 동의했고, 사인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 호흡이 약해지던 때 할머니의 말씀과 동의서는 모두 소용이 없었다. 작은 가슴이 흉부 압박으로 멍든 채로 할머니가 임종하셨을 때, 가족들은 항의했지만 담당 의사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 그런 서류를 확인할 새가 없었다”고 했다. 그 서류는 가장 위급해지는 그때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일이 종종 있으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 놓고도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포털에 들어가면 휴대폰 인증이나 공인인증서를 통해 본인이 조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서류를 작성한 이가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 규모의 병원에서만 거의 조회가 가능하다. 즉 대학병원이나 규모가 큰 병원·요양병원에서나 가능하지 일반 의료기관에서는 조회조차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열심히 상담받아 등록해 놓고서도 실제로 휴지조각이 되곤 한다.

지갑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카드를 넣고 다닌다고 해서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특히 결혼도 하지 않고 후손도 없을 사람들은. 정당한 보호자가 있어도 잘 인정되지 않는 이런 서류의 힘을 과신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생활동반자법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나는 나의 이 중요한 의사가 박제된 서류로만이 아니라, 실제 나와 생활을 함께해왔기에 나의 평소 의사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올바로 대리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나의 평소 신념을 알고 있는 상태로, 서로 돌봄을 주고받으며 함께 생활하기를 원한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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