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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교제폭력 사각지대 드러낸 ‘연인 보복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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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직후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모씨가 2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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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조사 직후 상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적·제도적 허점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추가 범죄로 이어질 ‘위험성’을 더 높게 보지 않은 경찰의 초동조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동시에 피해자 보호와 관련해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교제폭력의 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숱한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마련된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처럼 보복 가능성에 대비한 피해자 보호조치 규정이 촘촘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별 후 폭력’인데 위험성 ‘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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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연대회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이이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페미사이드(여성살해) 추방을 요구하는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집회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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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경찰의 미흡한 초동조치다. 피해자 A씨(47)는 지난 26일 오전 5시40분쯤 경찰에 김모씨(33)를 교제폭력으로 신고했다. 경찰은 이들을 23분간 조사했으나,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를 하지 않았고 결국 보복 살인으로 이어졌다. 먼저 조사를 마친 김씨는 A씨의 집에서 흉기를 들고나와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대기했으며 예상대로 A씨가 나타나자 수차례 흉기로 찔렀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지난 27일 언론브리핑에서 “앞선 신고에서 A씨와 김씨 모두 ‘팔을 잡아당긴 정도’의 경미한 폭행이었다고 진술했다”면서 “A씨에게 스마트워치 지급 등 보호조치를 안내했으나 주거지 순찰만 원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피해자 의사를 고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상황 판단이 안이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교제폭력, 가정폭력 등의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시에 불러 조사하는 경우 통상적으로 피해자를 먼저 내보낸다”라면서 “피해자가 먼저 나가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가해자가 먼저 나가면 피해자가 어디로 이동할지 알고 기다릴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경찰이 피해자 신변에 대한 위험성 평가를 ‘낮음’으로 평가한 것도 잘못된 판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피해자가 진술하는 폭행의 정도가 가벼웠더라도 ‘이별 후 폭력’은 추가 범죄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A씨는 사건 발생 나흘 전 김씨에게 이별을 통보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위험성이 아주 높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크리스트를 활용해 나온 점수보다는 더 상향된 조치를 했다”고 해명했다.

정상가족 틀에 매인 대책, 보호조치 두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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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 실루엣 사진.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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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정폭력이나 스토킹범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교제폭력도 피해자 보호를 실효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률상 혼인 관계 또는 사실혼 관계에서 발생한 가정폭력의 경우 경찰이 피해자 동의 없이도 가해자로부터 분리해 보호조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하다. 김씨는 A씨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경찰이 이 둘을 사실혼 관계로 봤다면 더 높은 수준의 조치가 가능했을 여지도 있다. 다만 경찰은 “둘 간에 결혼 의사가 없었으며 경제생활을 공유하지 않아 그렇게 보기 어려웠다”고 했다.

교제폭력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가 확연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사람은 2016년 8367명에서 2021년 1만554명, 지난해에는 1만2841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가정폭력이나 스토킹범죄와 달리 별도 입법이 마련돼 있지 않아 경찰 조치에도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교제폭력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으나 아직 현실화된 것은 없다. 이와 관련한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 2건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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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교제폭력 검거인원 /경찰청·대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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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폭력 전문가들은 피해자에 대한 보호조치가 지나치게 ‘정상가족’ 틀 안에 메여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에서는 (분리조치 등의) 보호 범위를 정서적으로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폭력’인지로 폭넓게 본다”면서 “그래야 교제폭력 피해자에 대한 촘촘한 보호조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송 사무처장은 “연인과 같이 친밀함에 기반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고 피해자가 안전할 공간도 부족하다”면서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당하는 폭력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이 잠재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보호 대상의 범위를 확대하더라도 피해자가 해당 조치를 거부하면 경찰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12월 발간한 ‘범죄피해자 등 신변보호제도의 현황과 개선방안’에서 “경찰로서는 피해자가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행동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서도 “경찰이 위험 여부를 판단해 가급적 신중한 행동을 하게끔 설득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윤 연구위원은 “피해자는 ‘설마 그럴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피해자 의사에만 의존해 보호조치를 결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면서 “피해자 의사를 순순히 따르기보다는 보호조치를 최대한 두텁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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