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덕 산업1부 차장 |
“툭 터놓고 얘기해서, 아침 출근 시간부터 욕설 섞인 확성기 소릴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인근의 한 기업 직원이 한 말이다.
현대차그룹 사옥 주변에선 10년째 집회·시위가 이뤄지고 있다. 기아의 지방 한 대리점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당한 자동차 판매업자 A 씨가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사옥 옆 염곡사거리에는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지 않고 A 씨가 내건 현수막 수십 개가 걸려 있다. ‘기아차 판매 내부고발 해고자 ○○○ 공동대책위원회’에서도 몇 명씩 나와 시위를 거들곤 한다. 현대차그룹 직원은 물론 인근 기업 직원들과 염곡사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은 원하지 않아도 A 씨 등의 주장을 보고, 들어야 한다. 그것도 정제되지 않은 비방과 욕설이 섞인 채로.
비단 A 씨 사례만일까. 삼성전자 서초사옥이나 KT 광화문사옥 등의 주변은 다양한 이유를 내건 시위대가 접수한 지 오래다. 대기업 총수 자택도 시위꾼들에겐 좋은 타깃이 돼 왔다.
헌법 제 21조는 1항에서 언론·출판의 자유와 함께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2항에서는 ‘허가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유를 확실하게 못 박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 수 있고, 다수인이 공동의 목적을 갖고 회합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한 것이다. 거리로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이 권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시위를 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언급하는 이들은 없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시위대가 타깃으로 삼은 기업이나 기관은 잘못이 있건 없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피해를 보면 고소, 고발을 통해서라도 적극적인 문제 해결에 나설 동기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시민들까지 듣고 싶지 않은 걸 듣고,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야 한다. 한두 번 지나칠 땐 그러려니 하겠지만, 주변 주택에 살거나 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피할 수 없는 ‘시위 공해’가 된다.
일부에선 헌법 제35조 1항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환경권을 거론하기도 한다. ‘환경’에는 물, 공기, 토양 등 자연 환경 외에도 미관과 소리 등 사회적 환경도 포함하고 있다는 해석에서다.
20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는 ‘전교조 34주년 결의대회’와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전국 행동의 날’ 집회, 시민단체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제40차 촛불대행진’ 등이 잇달아 열리면서 수만 명이 운집했다.
일부 차로가 통제된 광화문 일대는 극심한 교통 정체를 빚었다. 청계천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은 갑작스레 맞닥뜨린 대규모 시위에 당황해하며 자리를 떴고, 인근 예식장을 향하던 하객들 중에는 발만 동동 구르다 운전대를 돌린 이들도 있었다.
세상에 의무가 배제된 권리란 없다.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때도 타인의 권리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침해하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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