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가꾼 소유주 "추억 많아 아쉽지만, 조급해 않고 천천히 복구"
산불에 그을린 방해정 분재 |
(강릉=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조금만 늦어도 소실될 뻔했거든요. 이 정도라도 형태가 있으니 조금 위안이 되고, 보수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지난 11일 강원 강릉 일대를 덮친 화마(火魔)로 인해 강원도 유형문화재 방해정(放海亭)을 모두 잃을뻔한 박연수(85)씨는 "이만하면 천만다행이 아니냐"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20년 넘게 방해정을 내 집처럼 가꿔온 소유주 박씨는 "그동안 애쓰고, 사랑하고 좋아해서, 많은 추억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나 아쉽다"며 검게 그을린 물건들을 어루만졌다.
안을 들여다보자 창호지는 불에 타 벗겨졌고, 목재로 된 수납장과 그 위에 놓인 가재도구들이 새카맣게 타버린 탓에 바닥에는 검은 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박씨는 25년 전쯤 남편과 함께 방해정을 매입했다.
산석거사 이봉구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말년을 보내던 집이라던가, 그보다 더 이전에 신라시대 화랑들이 말을 타고 와 수련을 했다는 둥 역사적 배경을 듣긴 했지만, 박씨 부부는 방해정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매료됐다.
산불 피해 본 방해정 내부 |
박씨는 "어려서부터 기와집이나 초가집에 쑥이 난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며 "7남매를 키우면서 문화재를 가질 형편이 되지 않아 상상도 못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매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뜻밖에 운명처럼 문화재를 품은 박씨 부부는 새벽에 눈만 뜨면 분재와 수석을 가꾸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5년 전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난 뒤에는 아들과 함께 이곳을 가꿨다.
"처음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장이 멈출 것처럼 열이 막 오르고, 소방차도 사방에 가고 없는데 거기(방해정) 갔다가 나까지 문턱에서 쓰러지면 자식들은 어떡하나 싶어 안 가고 집에 있었어요."
박씨는 남편을 갑자기 잃었을 때를 떠올리며 청심환을 먹고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고 했다.
산불 피해 본 방해정 내부 |
그는 "아쉬움만 생각하면 복원을 못 한다"면서도 "여기서 하룻밤을 자더라도 불을 때야 할 텐데 '불이 날까' 무섭다"고 고개를 저었다.
박씨는 생기를 잃은 분재를 가리키며 "죽은 건 죽고 살 건 살 거다. 천천히,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복구하려 한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천천히 기다리겠다"라고 조급함보다는 여유를 갖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방해정 일부가 소실되고, 경포호 주변에 있는 작은 정자인 상영정(觴詠亭)과 사찰 인월사가 전소됐다.
불은 한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경포대 근처까지 불길이 번졌지만, 문화재청과 강원도·강릉시 공무원 등이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선 덕에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민속문화재인 강릉 선교장과 보물 오죽헌 역시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방해정 소유주가 25년간 가꾼 분재와 수석 |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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