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4 (일)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명품회화'가 돌아오기까지…파란눈 할머니도 감동한 3번의 방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 '매의 눈'으로 미공개 조선 회화 발견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유물…환수 위해 최선 다하겠다" 진심 전해

연합뉴스

게일 허 여사와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전 미국사무소장(현 특임연구관)
김 전 소장이 소장한 미술품을 설명하면서 각종 자료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격조가 있는 그림이네. 그런데 저게 누구 그림이지?"

지난해 6월 초.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 주택을 방문했을 때 김상엽 당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장(현 특임연구관)의 눈에 그림 하나가 들어왔다.

얼핏 봐도 예사롭지 않았던 그림은 1층 복도 구석에 걸려 있었다.

조선 후기 화가 소치(小痴) 허련(1808∼1893)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책까지 낸 그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김 전 소장은 그림을 소장한 80대 미국인 여성에게 말했다. "이 그림은 꼭 조사해야 합니다."

그가 '매의 눈'으로 찾아낸 작품은 김진규(1658∼1716)의 '묵매도'(墨梅圖).

조선 최대 서화 컬렉션으로 평가받는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 속 하나라 추정되는 작품이었다.

김 전 소장은 4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미국인 할머니가 한국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편한 마음으로 찾아뵈었는데 놀라운 작품이 줄줄이 나와 깜짝 놀랐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연합뉴스

김진규 '묵매도'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당초 게일 허 여사가 조언을 요청한 그림은 허련의 '송도 대련'(松圖 對聯)과 '천강산수도 병풍'(淺絳山水圖 屛風) 2건이었다.

2021년 세상을 뜬 남편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이웃에 살던 한국인 가족을 찾았다. 미국 미주개발은행(IDB)에 파견된 고광희 기획재정부 국장의 집이었다.

고 국장은 그 자리에서 한국대사관 등 지인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이후 연락을 받은 워싱턴 한국문화원이 재단 미국사무소에 내용을 전달했고, 허련 전공자인 김 전 소장이 직접 나서게 됐다.

김 전 소장은 "허련 작품만 생각하고 있는데 더 놀라운 작품이 나오니 마음이 바빴다"며 "재단 본부에 '석농화원' 작품일 수 있다고 보고하면서 전문가에게 빨리 자문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회상했다.

연합뉴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전 미국사무소장(현 특임연구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열흘 뒤 게일 허 여사의 집을 찾아 그림의 가치를 설명하고 기증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게일 허 여사가 소장품 중 하나인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를 보여주자 그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문인 화가 신명연(1808∼?)이 그린 이 그림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허련 그림만 보러 갔다가 '석농화원'의 낙장(落張·빠진 부분) 추정 그림을 발견했죠. 또 갔더니 중요한 작품이 또 나왔어요. 3번째 방문을 약속하면서 할머니께 제대로 설명해 드리고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었죠."

김 전 소장은 6월 말 게일 허 여사와 만나 작품 4건 모두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설득했다.

그는 "솔직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매에 나가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유물이고 환수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털어놨다.

연합뉴스

허련 '천강산수도 병풍'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혹시나 그림을 팔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속이 말이 아니었죠. 진심으로 길게 말씀드렸는데 1∼2초 뒤쯤 '기증하겠습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더라고요." (웃음)

게일 허 여사는 재단 측이 3번이나 방문하며 작품의 내용과 의미, 문화재적 가치를 상세하게 설명한 데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당초 생각했던 2건이 아니라 총 4건의 회화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 전 소장은 게일 허 여사의 평소 가치관이 큰 도움이 됐다며 공을 돌렸다.

경제학을 공부한 게일 허 여사는 아메리칸대, 메릴랜드대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은퇴한 뒤 16년간 미국 스미스소니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김 연구관은 "평소 예술은 개인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고, 공익을 위해 공유해야 한다 생각하셨다고 한다"며 "이번에 기증한 작품도 더 많은 한국인에게 알려지길 바라셨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기증서 전달식 모습
왼쪽부터 이애령 국립광주박물관장, 게일 허 여사,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장 [국립광주박물관·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년 8월쯤이었나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소유한 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고요 ."(웃음)

재단에 따르면 올해 3월 16일 기준 재단 해외 사무소에서 환수한 문화유산은 총 19건(305점)이다. 이 가운데 소장자로부터 기증받아 환수한 사례가 11건, 유물 점수로는 295점에 달한다.

조선시대 불화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인물 묘사가 섬세한 '석가삼존도'(釋迦三尊圖), 환수 이후 1년도 채 안 돼 보물로 지정된 '이선제 묘지'(李先齊 墓誌) 등이 기증 방식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해외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사무소는 재단 본부에서 파견하는 직원 2명과 현지에서 채용한 3∼4명, 일본사무소는 파견 1명과 현지 직원 1명이 근무 중이다. 이들을 모두 합쳐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김 전 소장은 "현지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며 "해외 사무소의 역할이 크고 중요한 만큼 미국, 일본뿐 아니라 유럽 등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 관리소가 내부 전시 공간 등을 관리·운영하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