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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빠른 추격자는 허상...혁신기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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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창업의 길 44. 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



중앙일보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가 9일 서울 성수동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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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한때 소위 잘나가는 공대 출신 스타트업 연쇄 창업가였다. KAIST에서 전기및전자공학으로 학ㆍ석ㆍ박사를 내리 마친 뒤 박사후연구원을 하다 창업에 나섰다. 그간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발명을 하고 시장에서 고객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2005년 온라인 업로딩 소프트웨어스타트업 아이콘랩을 공동창업하고, 이듬해 증강현실 관련 소프트웨어업체 올라웍스를 세웠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다 6년 뒤 350억원에 인텔에 매각됐다. 국내 스타트업 최초의 해외 매각 사례였다.

투자 스타트업 수가 211개에 달하는 국내 최고의 민간 액셀러레이터 퓨처플레이의 류중희(49) 대표 얘기다. 그는 올라웍스 매각 후 인텔에서 잠시 일하다 2013년 퓨처플레이를 창업했다. 올해가 만 10년이다. 지난 9일 서울숲 옆 성수동 퓨처플레이 본사에서 류 대표를 만나, 한국의 혁신창업 생태계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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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 퓨처플레이 사무실 내부.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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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퓨처플레이는 어떤 곳인가.

A : 혁신적인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있는 회사를 극초기에 투자해 성공적인 기업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회사다. ‘혁신적’이라는 것과 ‘극초기’이 두 가지는 굉장히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안 해왔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보상이 크지만 실패하면 그만큼 피해도 크다.

Q : 혁신 기술의 기준이 있나.

A : 10년 뒤 인류의 삶을 바꿀 정도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1,2년 뒤에 뭘 좀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준비해서 10년 뒤에 임팩트가 있는 것을 10년 전의 시각에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혁신기술 창업이다.

Q : 극초기의 의미는 뭔가.

A : 극초기라는 말보다는 그냥 스타트업의 시작점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창업가와 창업팀이 뭔가 하려고 준비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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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가 9일 서울 성수동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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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렇게 말하니 퓨처플레이의 성적이 궁금해진다.

A : 지금까지 베어로보틱스ㆍ서울로보틱스ㆍ뷰노 등 총 211개사에 투자했고, 91%가 지금껏 살아남았다. 투자 운용규모는 1461억원이다. 후속 투자 유치율은 79%, 211개 기업의 누적 기업가치는 6조2000억원에 달한다. 기업공개(IPO)한 기업이 3개다. 의료 인공지능(AI) 솔루션 기업 뷰노와 체외 진단 플랫폼 개발 기업 노을, 차량 공유 기업 쏘카가 그거다. 국내 유일 하이브리드 우주로켓 개발 스타트업 이노스페이스도 우리가 투자한 기업이다. 퓨처플레이는 국내 최고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류 대표의 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나쳐 보일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KAIST에 입학, 학ㆍ석ㆍ박사를 연이어 마치고, 창업해서 대박을 터뜨리며 성공적으로 쉼없이 달려온 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Q : 딥테크 창업에서 스타트업 투자ㆍ육성으로 바꾼 이유가 뭔가.

A : 인텔을 그만 둔 다시 스타트업을 창업할 것인가,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그간 내 경험으로 더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기술 창업가의 길을 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나 더, 내가 욕심이 많아서 짧은 인생 가기 전에 격변하는 기술의 맛을 다 보고 싶기도 했다. 향후 수십 년간 여러 분야에서 폭발적인 기술 격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액셀러레이터를 창업하지 않았다면 이노스페이스와 같은 우주로켓 스타트업과 인연을 맺을 수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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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가 9일 서울 성수동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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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혁신기술 창업이 왜 중요한가.

A : 결국은 경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제로 투원』을 쓴 미국의 벤처투자가 피터 틸은 ‘경쟁은 질병’이라 얘기했다. 혁신기술 기반 창업은 아무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에르메스와 페라리가 그런 것처럼. 이번 미ㆍ중 기술 패권 갈등은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ㆍ빠른 추격자)라는 게 얼마나 허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지금 그들이 만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반도체든 뭐든 아무것도 못 판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유럽과 일본까지 다 동참했고, 한국은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지 않나. 미국이 뭐라 하든, ‘나 이거 안 팔아’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거다. 그걸 못 만들면 우린 그냥 종속국가가 되는 거다.

Q : 이쯤에서 R&D 패러독스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투자는 세계 으뜸인데 왜 혁신기술이 잘 나오질 않나.

A : 대학의 교수나 기업ㆍ연구소의 고위직처럼 연구주제의 의사결정권을 가진 나이가 많은 분들은 창업가가 되기 어렵다. 진짜 창업가가 될 자세가 돼있는 사람들은 기업의 젊은 직원들이나 대학원생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창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다면, 거기에 투자가 들어간다면 창업으로 이어질 거다. 우리 연구 현장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20~30대의 창업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연구자들이 하고 싶어하는 연구에 R&D 투자가 들어가지 않는 게 문제다. 이건 공공 R&D나 민간 R&D 모두 마찬가지다.

류 대표는 R&D 패러독스가 생기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 자신이 희생양 또는 경험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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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Q : 그래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ㆍ시장 선도자)형 혁신기술이 필요한 것 아닌가.

A : 나는 퍼스트 무버라는 말도 어폐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뭔가를 시작할 때 자신이 퍼스트 무버인지 아닌지 알기는 너무 어렵다. 전세계에 수많은 연구자가 있으니. 나는 ‘오리지날러티’(originality)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한국 교육은 송두리째 잘못됐다. 오리지날러티에 대한 인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서양의 교육현장은 수업 중에 문제를 풀 때 지금까지 없던 방식으로 푸는 것을 높이 사는데, 한국은 모난 돌이 정 맞는 문화다. 연구현장도 똑같다. 전혀 창의적이지않고, 오리지널하지 않은 연구를 하고 있다.

Q :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약한 고리가 있다면.

A : 모험자본이라고 말하겠다. 모험자본, 즉 벤처캐피털이라는 건 말 그대로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을 그렇지 않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high risk high return)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주저한다. 미국 벤처캐피털은 ‘내가 믿는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한 업’으로 정의한다.‘10년 뒤에 이렇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베팅한다. 실패해도 할 수 없다’라는 자세로 투자한다. 하지만 한국 벤처캐피털은 스타트업 투자를 금융업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수익률에 집중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익률이 크게 안 나온다.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low risk low return), 대출금리 정도 나오는 걸 어떻게 벤처 캐피털이라 할 수 있나.

Q : 최근 대기업의 기술탈취 문제가 도마에 올랐는데.

A : 대기업은 스스로 혁신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외부 스타트업을 M&A해야 한다. 문제는 국내 대기업 사람들이 창업가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못하는 것을 창업가가 하기 때문에 만나는 건데, ‘나도 사실 할 수 있는데, 너희들에게 은전을 베푸는 거야’라는 식의 생각을 가진 대기업 임직원들이 진짜 많다. 기술 탈취는 이런 문화적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런 대기업들이 미국이나 유럽ㆍ이스라엘 스타트업을 만날 때는 훨씬 더 저자세를 보인다. 한마디로 기술 사대주의다. 국내 대기업이 잘하는 부분도 있지만, 미래를 향해 가려면 변신이 필요하다.

Q : 문화가 그렇다고 해도 실제 기술탈취는 왜 생길까.

A : 두 가지다. 서구는 결과에 집중하는 문화다. 정한 시점까지 프로젝트를 끝내기 위해 유일한 방법이 외부 솔루션이라면 당연히 인수를 해서 쓴다. 한국은 ‘월급줬는데 왜 안에서 해결 못하고 비싼 돈 주고 밖의 것을 쓰느냐’는 식의 문화가 지배적이다. 외부 솔루션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거에 대한 칭찬이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남의 특허를 분석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는 거다. 또 하나는 특허에 대한 무지다. ‘이 정도 기술이면 우리 엔지니어 시켜서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대기업 임원들을 자주 만난다.

Q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A : 최근 기술 탈취 이슈들에 정부가 기민하게 움직여 주긴 했다. 하지만 결국은 돈이다. 기술 탈취에 대해 강한 징벌이 내려지지 않으면 대기업 임원들의 자세가 안 바뀔 거다. 미국 등 서구에선 남의 특허를 잘못 건드리면 강력한 징벌적 배상을 당해 그냥 망할 수밖에 없다. 입법부에선 기술탈취에 엄벌을 내릴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사법부에선 이런 사례에 공격적인 판례를 만들어 주셔야 한다.

그는 요즘 여러 가지 이유로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번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요즘 들어서 목이 마구 졸려오는 느낌이 들기 때문” 이라며 “미ㆍ중 갈등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변화와 한국 경제의 위기, 인구 감소와 환경문제와 같은 것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안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 길은 혁신 기술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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