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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아재 술’인데, 어디가 좋아서…2030이 부르는 ‘위스키 찬가’ [스페셜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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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의 한 편의점 앞에 오전 8시부터 긴 줄이 이어졌다. 마치 백화점 명품관, 한정판 상품을 판매하는 유명 편집 매장 앞을 방불케 하는 풍경. 마스크를 쓴 인원이 있어 정확하게 가늠은 안 되지만, 연령은 대부분 20대와 30대다. 이들이 구매하려는 상품은 ‘아재 주류’로 불리던 위스키. 이들은 오후 2시 판매되는 상품을 구하기 위해 6시간 동안 편의점 앞을 지켰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3개 점포에서 진행한 ‘위스키 오픈런’ 행사 장면이다. 세븐일레븐 관계자는 “행사가 주말이 아닌 평일에 진행됐음에도 위스키를 구매하려고 하는 소비자가 많이 몰렸다”고 설명했다. 이날 준비한 상품은 30여분 만에 동이 났다. 오픈런에 더해 아이돌 콘서트 문화의 전유물 ‘피케팅(피 튀기는 표 구매)’도 감지된다. 이마트, CU 등이 자사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한 예약 판매를 진행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위스키 인기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본격적인 ‘위스키 드라이브’에 나선 편의점의 위스키 매출은 전년 대비 60% 이상 늘었다. GS25의 경우 지난해 위스키 매출이 전년 대비 65.6% 증가했다. 올해도 인기가 이어지면서 1월과 2월 위스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6.7% 개선됐다. CU도 마찬가지. 지난해 위스키 매출은 전년 대비 48.5% 증가, 올해 1~2월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 이상 늘었다. 위스키 수입량도 급증세다. 2021년 1만5661t이던 수입량은 지난해 2만7038t으로 72.6% 증가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위스키 수입액은 3300억원으로 2008년 이후 최고치다.

특히 최근 위스키 열풍이 주목받는 것은 ‘소비 주도층’이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간 위스키는 ‘올드(old)’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 때문에 50대 이상 아재들이 즐기는 문화로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위스키를 소비하는 주력 세대는 20대와 30대다. 이 같은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GS25의 경우 지난해 위스키 판매량 중 39.6%는 20대, 43.3%는 30대가 구매했다. CU도 20대(25.3%)와 30대(28%) 판매 비중이 다른 세대에 비해 월등히 높다.

2030세대는 단순히 위스키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로 만들고 있다. 다양한 위스키 종류와 역사를 공부하고, 자기만의 칵테일 제조법을 공유한다. 위스키를 곁들여 독서, 토론하는 모임도 생겨났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위스키 열풍이 불고 있는 배경은 뭘까.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인식 변화·접근성 개선·다양성’ 3가지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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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RM’도 마시는 위스키

아재 술 → 힙한 문화…확 달라진 인식

2030세대 사이에서 위스키 열풍이 시작된 가장 큰 이유로는 인식 변화가 꼽힌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최근 공개한 ‘올해(2022년)의 MZ세대 데이터 총결산’에 따르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위스키 연상 이미지는 과거 ‘알코올 도수가 높아 접근하기 어려운 술’에서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마시는 전문적인 술’로 변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는 이를 두고 위스키는 MZ세대가 중요시하는 3가지 가치(희소성·다양성·디테일)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더해 일종의 ‘가성비’도 챙길 수 있다는 점도 인식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위스키 스터디를 진행하는 강다혜 씨는 “희석식 소주와 맥주보다는 좋은 술을 마시고 싶은데, 아무래도 같은 용량의 와인 대비 위스키는 도수가 높아 천천히 오래 마실 수 있다”며 “보관도 와인보다 용이하다”고 말했다.

달라진 인식은 빠르게 확산했다. 마치 ‘힙지로’ ‘힙래동’이 퍼져 나갈 때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소수만 알던 힙한 문화는 소셜미디어(SNS)와 미디어를 통해 확산됐고, 서로 추천하는 위스키와 팁을 공유하며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남던(남대문 위스키 주류상가)’ ‘데일리샷(위스키 가격 비교 앱)’ 등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이 즐겨 쓰는 일종의 ‘은어’도 생겨났다.

여기에 연예인들의 위스키 언급도 문화 확산에 한몫했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은 지난해 12월 방송에 나와 “위스키를 마시면서 책을 보면 (책의 내용이) 영화처럼 펼쳐진다”고 말했다. 이후 위스키 독서 모임 가입 신청이 폭주했다는 후문이다. 위스키 독서 모임장 A씨는 “RM 발언을 몰랐는데, 이상하게 가입하고 싶다는 지인이 늘어서 알아봤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 몇 분은 최근 참석이 뜸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위스키업계는 이 같은 현상을 고려, 성장세 유지를 위해 트렌디한 연예인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가고 있다.

일단 광고 모델 연령을 낮췄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시바스(Chivas)’는 아시아 홍보 모델로 블랙핑크 리사를 선정했다. 발렌타인을 수입·판매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지난해 주지훈을 새롭게 발탁했다. 4년 동안 이정재와 정우성을 모델로 3040세대를 공략해온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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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일레븐 챌린지스토어점 앞에 위스키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세븐일레븐 제공)


가성비로 입문하는 2030세대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매…접근성 UP

인식 변화로 위스키 수요가 늘자 유통업계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위스키 종류를 다변화했다. 자연스레 가격대도 다양해졌고, 위린이(위스키+어린이) 입문을 도울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위스키도 하나둘 진열대에 올라왔다. 지난해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위스키 매출에서 10만원 미만 가성비 위스키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73.6%, 74%, 65%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위스키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처음부터 가격이 높은 위스키를 구매해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서 “젊은 친구들은 일단 가성비를 챙길 수 있는 저렴한 라인부터 위스키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급형 맥켈란’ 수식어를 갖고 있는 더 페이머스 그라우스(2만원대), 블랙 보틀(2만원대), 스모크 스캇(4만~5만원대) 등이 대표적인 입문용 위스키다.

구매처 다양화도 위린이의 입문에 도움이 되고 있다. 꼭 백화점, 대형마트까지 가지 않아도 접근성이 높은 편의점에서 위스키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다.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 관계자는 “다양한 행사들을 중심으로 편의점이 새로운 위스키 판매처로 자리매김했다”며 “서울 외 전국 지역 고객에게도 희귀 위스키를 공급하는 주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편의점업계는 최근 진행한 ‘위스키 기획전’이 높은 인기를 얻으면서 위스키 판매를 강화할 방침이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 관계자는 “업체들마다 한정판 위스키 판매 경쟁이 뜨거운 만큼, 위스키 인기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오프라인 점포뿐 아니라 포켓CU 앱 등 온라인 주류 예약 서비스를 통해 고객 접점을 넓혀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식하게 술 마시던 시대 끝

위스키 특유의 ‘다양성’에 꽂혔다

단순히 인식이 변하고 접근성이 좋아졌다는 점만으로는 현재 위스키 인기를 설명하기 힘들다. 열풍에 가까운 현재 인기에는 위스키 특유의 다양성이 자리 잡는다. 흥미와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MZ세대에게 딱 맞는 술이라는 것.

위스키는 음용법이 다양하다. 위스키 전용 잔에 소량의 위스키를 부어 바로 마시는 ‘스트레이트’, 얼음을 넣어 차갑게 마시는 ‘온더락’, 탄산수와 레몬을 넣어 가볍게 즐기는 ‘하이볼’, 미지근한 물을 넣어 향을 강화한 ‘미즈와리’ 등 마시는 법만 10가지가 넘는다. 잔에 붓고 마시기만 하면 끝인 소주, 맥주 등 다른 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위스키 스터디를 진행하는 강다혜 씨는 “위스키는 다양하게 감각할 수 있는 술”이라면서 “(젊은 세대들이) 소주를 다양하게 변용하는 것처럼, 위스키도 변용해서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점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위스키·코냑 클럽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위스키 음용법에 대해 질문하는 젊은 사람들의 문의가 줄을 잇는다. 유튜브에서 위스키 마시는 법을 설명한 영상들은 조회 수가 100만회를 훌쩍 넘어간다.

위스키의 역사가 깊고 종류가 많다 보니 위스키 자체를 공부하며 재미를 느낀다는 반응도 상당수다. 자체 모임을 만들어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매장을 찾아다니며 ‘멘토링 클래스’를 듣는 소비자 수가 적잖다. 시간 상품 판매 업체 원앤온리가 독서 모임 업체 트레바리와 손잡고 내놓은 ‘위스키·젤라또 페어링’ 모임 상품은 판매 시작과 함께 완판됐다. 셰프와 칵테일 전문가와 함께 위스키·칵테일을 시음하고 위스키에 담긴 배경 이야기를 나누는 상품이다. 조아란 원앤온리 대표는 “홍보를 별도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이벤트 티켓이 매진됐다. 인기가 많은 만큼 매번 베이스 위스키를 바꿔가며 월간 정기 이벤트로 진행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덩달아 유통 업체가 마련한 시음·멘토링 클래스도 인기를 끈다. 2월 22일 롯데마트의 와인·위스키 전문 매장인 보틀벙커 제타플렉스점에서 디아지오코리아가 개최한 ‘위스키 멘토링 클래스’는 참가자 대부분이 2030세대였다. 총 5회 열린 이 시음 행사는 보틀벙커가 SNS 계정으로 참가 신청을 받은 지 1시간 만에 예약이 모두 마감됐다.

앞으로 전망은 어떻게

“주류 문화 중 하나로 안착할 것”

없어서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위스키 열풍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과 같은 ‘광풍’은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주류 문화 중의 하나로 위스키 음용 문화가 자리 잡으리라 내다본다.

현재 광풍에 가까운 인기는 위스키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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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싱글 몰트 위스키 ‘기원’. (쓰리소사이어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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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는 생산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짧은 시간 내 대량으로 제조가 가능한 희석식 소주, 맥주보다 제조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수요가 급증해도, 공급량을 즉각 늘릴 수 없는 구조다. 희소성이 강하다 보니 줄을 서야만 구할 수 있는 술이 된 것이다. 똑같이 인기가 높은 와인의 경우 오픈런이 드물다. 희소성이 높은 와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줄을 서는 경우가 많지만, 위스키에 비하면 생산량이 많고 종류도 천차만별인 덕분에 ‘줄 서서 사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유통업계는 공급 물량이 좀 더 풀리면 현재의 과열된 인기가 진정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다만, 과열 양상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인기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이볼이나 칵테일 등 위스키 주류 음용법은 대중적인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미 국내에서 자리 잡은 와인처럼 위스키도 국내의 주류 문화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생산에 나서는 기업도 등장하는 분위기다. 김창수위스키, 쓰리소사이어티스증류소 같은 소형 생산 업체들은 국내산 싱글 몰트 위스키를 내놓으며 시장에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신세계L&B, 롯데칠성음료 등 대기업도 위스키 생산 준비에 한창이다. 국내산 위스키까지 보급되면 한국에서 ‘쉽게’ 접할 주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GS리테일 관계자는 “희소가치를 중시하고 섬세한 주류 취향을 가진 주류 애호가를 넘어 요즘 2030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하이볼 등 믹스해 먹는 트렌드는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주류 문화의 한 축으로서 위스키 인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1호 (2023.03.22~2023.03.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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