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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경제직필] 1965년과 2023년의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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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한·일관계의 급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는 3·16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그간 한·일관계를 가로막고 있던 난제들에 대해 전격적인 양보를 선언했다. 강제징용에 대한 사법부 판결과 피해자 의사를 건너뛰어서 일본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 또한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에 대한 WTO 제소도 전면 철회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도 복구하기로 했다.

경향신문

이일영 한신대 교수


한·일관계는 1965년 수교 이후 극단적인 스윙을 거듭해왔는데, 이번에도 또 한번 급선회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한국의 안보·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그러나 한·일관계 관련 전문가들과 실무자들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의 변경은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번처럼 협상에서 일방적 양보와 부등가 교환이 이루어지면, 한·일관계의 정당성과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1965년 한·일 기본협정이 체결된 맥락을 돌아보면, 한·일관계는 세계체제와 국내 정치경제 체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세계체제-한반도체제에 투입되는 요소이면서 그 체제가 복잡하게 작동한 결과이다. 1965년에도, 2023년에도, 한·일관계는 세계체제와 국내의 자유주의·민족주의가 접촉·충돌하는 경계선이다. 한국 정부 단독의 양보와 결단만으로 한·일관계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잡계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인식과 행동이 엉뚱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해방 이후 세 차례의 민주화 국면을 경험했고, 이때 세계체제와 상호작용하면서 정치·경제 체제를 형성해왔다. 1960~1965년, 1987~1992년, 2017~2022년의 국면에서 나타난 민주화의 진퇴는, 세계체제와의 접촉·갈등, 경제모델의 전환, 안보질서의 재구축 등과 연결된 복합적 양상이다. 1965년 전후의 한·일관계 진전, 1992년 전후의 한·중관계 진전, 최근의 한·일관계 진전은, 정치·경제 체제의 이행과 순환의 국면을 반영한다. 한국의 정치·경제 체제의 기본 틀이 확립된 시기는 1960~1965년이다. 이때 이후 한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자유주의·민족주의에 기반한 국민국가·국민경제의 지향성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4·19 혁명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민주화·산업화의 체제적 경로를 만들어낸 결정적 계기이다. 4·19 혁명을 통해 국민적 열망이 분출하고 국가의 민주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한·일관계 개선은 세계체제로의 편입과 자본축적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시작된 민주화 국면은, 격화되는 냉전체제와 갈등했다. 동아시아에서는 격렬한 진영 대립과 함께 진영을 묶어내려는 힘이 강화되었다. 1961년에는 북한이 중·소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었다. 1964년에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이 본격화되고, 중국의 핵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사회주의권 봉쇄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려는 압력을 강화시켰다. 일본의 안보를 강화하고 한국에 대한 원조는 줄이고자 했다. 그 결과로 한·일 기본협정이 체결되고,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이루어졌다.

1960년 4·19 혁명이 열어젖힌 민주화 국면은, 1965년 한·일 기본협정을 거치면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발전지상주의 경제체제로 귀결되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세계체제의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확대되지 못한 탓도 크다. 당시 정치권에는 여야를 넘어 자유주의·민족주의 세력이 존재했다. 그러나 정치적 진영 대립의 격화는 결국 분단체제와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강화에 기여했다.

이후에도 자유주의·민족주의 세력의 분열은, 민주주의의 심화와 경제적 평등화를 방해했다. 1987년의 민주화 국면은 사회주의권 붕괴, 한소·한중 수교, 글로벌화, 신자유주의의 수용 등과 중첩되었다. 이 시기에도 민주화 세력 내 자유주의·민족주의 세력은 효과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폭넓은 연합은 제도화되지 못했고, 민족주의 동원은 한계에 부딪혔다. 이번의 한·일관계 급변경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반작용과 함께 미국의 세계체제 재편 압력에 부응한 측면이 있다. 한·일관계 변경과 민주주의 후퇴가 결합했다는 점에서 1965년 상황과 흡사하다.

그러나 2023년이 1965년과 다른 점도 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훨씬 강화되었고, 글로벌 망을 재편하는 비용은 막대해졌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민족주의 세력의 폭넓은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체제 개선을 위해서는 더욱 신중한 고뇌와 창의적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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