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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팀장칼럼] 반도체 코리아에 ‘인재 절벽’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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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원래 1등은 메모리 사업부로 보내고 2등은 시스템LSI로 보냈죠. 3위, 4위하면 파운드리로 갔고요. 지금은 순위가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한정된 인재들을 돌려막기식으로 운용하는 건 여전합니다. ”

삼성전자와 TSMC에서 모두 일한 경험이 있는 한 반도체 원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던진 말이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TSMC와의 경쟁에서 늘 버거운 싸움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결국 반도체도 ‘사람 놀음’인데 TSMC에는 사람이 넘쳐나고 삼성전자에는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다.

한국 전자·IT 산업의 아이콘이자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인재 부족에 시달린다는 건 반도체 산업 전체에 인재 부족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국내 반도체 산업 전역에 걸쳐 전문 인재가 점점 말라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전국에서 매년 배출되는 반도체 관련 전공자는 600~700명 남짓이다. 매년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은 1500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해 추진해온 인재 양성 프로그램에는 지원자가 늘 부족하고, 회사의 미래 경쟁력에 중추가 될 박사급 인재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실제 2023학년도 정시 모집에서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된 일부 대학의 반도체 계약학과 합격자 전원이 등록을 포기하는 처참한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인재들을 키워놓아도 해외 기업으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석박사급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지만, 좀처럼 방어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최근 한 학술대회에서 “겨우 키워놓으면 인텔이나 마이크론에 다 빼앗긴다”고 쓴소리를 뱉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수도권인 용인 지역에 300조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 국내 인재들을 더 많이 키워낼 것이라는 포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일각에선 문제는 지역이나 입지가 아니라는 설명을 내놓기도 한다. 반도체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번 투자가 무조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재 부족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문화나 업무여건과 관련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에 인력이 부족한 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반도체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미국에서도 인력 부족은 최근 심각한 화두로 떠올랐다. 인텔의 인사 부문 책임자인 신디 하퍼 부사장은 최근 “반도체 시장은 수요에 비해 지원자 규모가 매우 적다”며 “인재 채용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왜 반도체 기업이 떠오르는 세대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지 생각해봐야하는 시점이다. 유럽 최대 반도체 기업인 ST일렉트로닉스의 한 관계자는 “MZ 세대들이 반도체 기업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ST가 참고한 각종 조사 지표들을 살펴보면 MZ 세대들은 단순히 많은 연봉보다는 기업의 이미지와 지속가능성, 업무 환경 같은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는 사람을 ‘갈아넣는’ 방식으로 혁신을 지속해온 종합반도체기업(IDM)의 이미지를 지금의 MZ 세대가 거부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거대한 기업의 작은 부품이 되어 갈려나가는 것보다는 더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을 원한다. 지난 2021년 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MZ세대가 괜찮게 생각하는 일자리 인식 조사에서도 1위(63%)가 ‘워라밸이 보장되는 기업’이었다.

실제 공대 대신 의대 진학의 이유로 ‘워라밸’로 드는 MZ 세대들도 다수다. 최근 기자가 만난 대학생 A씨는 “야근, 회식, 사회생활과 같은 부담이 크다”며 “의대를 선택한 건 ‘돈’보다 ‘삶’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원이 일을 잠시 쉬고 재취업하는 것은 어렵지만 의사는 자격증과 실력만 있다면 휴식기간을 가지고도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이 같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가령 수년 전 SK하이닉스의 한 고위 임원이 당시 경영진 앞에서 “애플이나 인텔에 갈 천재를 무슨 수로 경기도 이천에 데려오겠느냐”며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이후 SK하이닉스는 대외적인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위해 TV 광고를 내보내기도 하고, 근무환경 개선에 적잖은 투자를 단행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바꾸는 데는 충분치 않았다는 평가다.

유럽 대표 반도체 기업들이 어떻게 MZ 세대를 끌어들이고 있는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실제 ST나 독일 인피니언, NXP 등 유럽계 기업들은 미국이나 아시아 기업들과 달리 인재 부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ST 관계자는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반도체 기업이 가지는 이미지가 ‘3대에 걸쳐서 가족들이 다닐 정도로 정도로 안정적이고 착한 기업’에 가깝다”며 “ST를 비롯한 유럽 반도체 기업들이 인력난에 시달리지 않는 것도 기업 이미지와 문화, 근무환경 등을 포함한 지속가능성 노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황민규 전자팀장]

황민규 기자(durchm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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