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수 목사가 지난 2일 수원의 경기도노동복지센터 노동상담소에서 16년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일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월급이나 퇴직금을 대신 받아주는 일을 해왔다. 김종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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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을 출간했던 40년 전을 회상하며 “판매금지가 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에 초판을 2만 부나 찍었다”고 소개했다. 한 번에 많이 찍어 신속하게 유통시키자는 생각이었다. "정상적인 루트로는 보급이 불가능할 것 같아 교회 청년회 등에 책을 대량으로 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정권을 피해 전전하던 그는 농사도 짓고 사업도 여러 차례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빚쟁이에 쫓기던 쉰네 살의 그는 돌연 목사 공부를 시작했다. 채권자들이 신학교까지 찾아와 빚 독촉하지는 않을 것 같아 도피처로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이 또 한 번 그의 인생을 바꿨다. 예순의 나이에 목사가 됐고, 경기도 안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30대에 노동 서적을 출판하며 만났던 여공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길로 연고도 없는 화성에 ‘화성 외국인 노동자 센터’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이주 노동자가 가장 많은 동네라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이후 16년간 퇴직금 떼이고 월급 떼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돈을 대신 받아주는 일을 했다.
‘소장’이라는 직함의 그가 센터에서 받는 월급은 70만원. 남들 떼인 돈은 받아주지만 정작 자기 월급은 못 챙기는 일도 많다. 후원금이 들쑥날쑥해 직원을 줄여야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센터 운영을 접지는 않았다.
지난달 20일 『오랑캐꽃이 핀다』 출간 기념회에서 발언하는 한윤수 목사(오른쪽). 16년간 외국인 노동자들을 도운 일을 기록한 10권짜리 책이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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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6년 동안 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무명씨들의 도움 덕분”이고 “이상한 일”이라며 웃었다. 센터를 접어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마다 새 후원자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영리단체는 5년만 넘기면 안 망한다’는 말만 듣고 그때까지만 어떻게 버텨보자고 했는데, 실제로 5년을 넘기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뜻밖의 후원자들이 생겼다. 신자가 세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후원금 400만원을 보내온 적도 있다. 희한하게도 매번 그런 식으로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15년 8개월이 지나갔다”고 했다.
이주 노동자들을 도우며 얻은 명성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게 “전국에서 제일 돈 잘 받아주는 목사”라는 표현이다. 화성 외국인 노동자 센터는 지금도 일요일만 되면 전국에서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립선암 투병 끝에 심실보조장치까지 달게 됐지만 한 목사는 현역이다. 그는 “걸어서 센터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한국의 이주 노동자 인권은 나아졌을까. “이제는 월급 떼먹는 사장은 없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다만 퇴직금을 안 주려는 꼼수는 여전히 횡행한다. 그는 “그래도 상황은 조금씩 나아진다”며 “퇴직금을 안 주려고 계약 종료 직전 해고하거나 월급에서 떼인 돈을 퇴직금이라며 주는 관행도 점차 사라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의 철칙은 센터를 찾는 이주 노동자들을 상대로 전도하지 않는 것. “도와주는 대가로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그건 ‘기브 앤 테이크’일 뿐”이라며 “힘닿는 데까지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무작정 돕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목회이고 전도”라는 그의 말에는 오랜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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