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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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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윤 대통령도 실패? 내가 또 사과해야지” [실패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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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시즌2 : 실패연대기] <2>정치인 김종인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 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박근혜·문재인 정권 창출 도운 데 사과...
당선 뒤 ‘고맙다’ 전화한 사람 윤 대통령뿐”
이루지 못한 내각제 개헌 꿈 “곧 때가 올 것”
한국일보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1월 27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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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서 배워야 하는데, 실패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배우질 못하지.”

인터뷰 주제가 ‘실패’라고 하니, 그는 채 다 듣기도 전에 할 말을 쏟아냈다. “정치의 실패뿐 아니라 인생의 실패담도 궁금하다”는 말엔 “내 실패요?”라고 반문하더니 “적당한 때를 잡아서 오세요” 했다.

정치인 김종인(83). 그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수식어가 여럿이다. 대한민국 비상대책위원장,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 구원투수, 여의도 차르, 대통령 후보들의 멘토. 그는 “(그때마다) 내 할 일을 했을 뿐, 나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올해로 여든셋이지만, 누구도 그를 ‘원로’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정치판의 현역이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1월 27일도, 그는 여의도에서 한 국회의원과 오찬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일부러 의원들을 만나지는 않는다. 보자는 사람이 있으면 보는 정도”라고 했지만, 휴대폰은 인터뷰 중에도 끊임없이 울렸다.

그의 사무실은 대한발전전략연구원. 1992년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두면서 만들었다. 현판도 31년 전 연구원이 문을 열 때 내건 것이다. 지금은 개인 집무실에 가깝다.

마주 앉은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육체의 나이 같지 않은 에너지를 내뿜었다. 여전히 거침없었고, 어떤 질문엔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했다.

[실패①] “조부는 법을 공부하기 바랐으나”

한국일보

한때 그의 넥타이 색은 여의도의 화제였다. 그는 “요즘은 아예 매지 않을 때가 많다”며 웃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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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까지 그의 삶을 설명하면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가인 선생은 그에겐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였다. 네 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잘 알려진 가인 선생은 항일 독립투사들의 변호인이자, 정치인이었다. 평전 ‘가인 김병로’를 쓴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도 우ㆍ좌파를 아우른 가인의 인맥과 그가 변호했던 독립투사들을 거론하면서 가인을 ‘중도적 통합주의자’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호 가인도 ‘거리의 사람’이란 뜻이다. 나라 잃은 백성은 집이 없는 셈이란 의미가 담겼다.

김종인 전 위원장의 삶을 감히 가인 선생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진영에 얽매이지 않은 독립적 행보는 조부와 닮았다. 그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어떻게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뒤에 보이는 사진이 조부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죠?

“맞아요. 할아버지 옆에서 정치의 속성을 많이 배웠죠.”

-할아버지께서도 일찍이 부모를 잃었는데, 자식까지 먼저 보내고 어린 손주를 키우게 돼 애틋한 마음이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애틋함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어요. 엄하셨거든. 일례로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의무가 뭔지를 강조하시면서, 대표적으로 군 복무를 말씀하셨죠. 혹시라도 내가 (군 면제를 받은 탓에) 군대를 가지 않을까 봐 미리 설명을 하신 거지. 그래서 내가 신체검사도 안 받고 입대를 해버린 거요.”

-가인 선생은 어떤 할아버지였나요.

“변호사를 하셨지만, (일제강점기 화전민, 농민 같은 약자들과 독립투사들 변론을 해)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개인의 삶과 공적인 삶을 철저히 구분하고 늘 공을 앞세우셨지. 그러니까 사생활이란 것이 별로 없으셨어요.”

인생의 첫 실패도 조부의 기대와 본인의 바람이 달라서 빚어진 것이었다.

-처음 인생의 쓴맛을 본 건 언제였나요.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일이 있죠. 서울법대를 시험 봤는데 안 됐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하도 법을 공부하라고 해서. 그래도 그렇게 좌절하거나 실망하진 않았어요. 재수니, 뭐니 다 집어치우고 빨리 한국에서 (학부를) 끝내고 유학 갈 목표를 세웠으니까. 나는 실패하면, 그건 빨리 인정해 버려요. 과거를 별로 생각하지 않아.”

-조부께선 법조인이 되길 바랐나 봐요.

“반드시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기보다는 법을 공부해야 그것이 기본이 돼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한국외대 독일어과에 진학한 뒤 1964년 독일 뮌스터대로 유학을 떠나 8년 만에 학부부터 석사, 박사과정까지 끝내고 귀국한다.

-독일 유학을 가서도 법학이 아니라 경제학, 재정학을 공부하셨죠.

“내가 할아버지한테 그랬어요. 앞으로는 경제를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거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경제 세력도 커질 테니까.”

-신념으로 삼는 경제민주화도 결국은 그 얘기인데요.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군이 권력을 장악했던 시절인데, 시대가 변할 거라는 예측을 한 건가요.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경제 세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지만,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언젠가는 정치를 압도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고 봤어요. 그러니까 경제민주화라는 건 별것 아니에요. 모든 문제를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니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거지. 팬데믹 시기에 시장 논리에만 맡겼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정부가 기업 운영에 간섭할 필요는 없지만, 경제가 움직이는 틀은 정부가 보완하고 짜야지. 그런 걸 모르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3개월을 함께했다고 들었어요. 임종을 지키고 홀로 유학길에 나선 심정은 어땠나요.

“1962년 말부터 야권 통합 정당 물밑작업이 시작돼 정치인들이 우리 집에 엄청 드나들었어요. 나는 할아버지 곁에서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죠. 그러다 임종 무렵에는 내가 병원에서 3개월간 모셨고요. 할아버지가 1964년 1월 돌아가시고 나서 석 달 만에 독일에 갔는데 외려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나도 지칠 대로 지쳤던 거지.”

[실패②] 두 번의 배신, 두 번의 실패

한국일보

그는 다음 책 구상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나라가 독일이라고 본다. 독일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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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까진 이렇다 할 실패라곤 없는 삶이었지만, 정치를 하면서 달라졌다. 사과할 일도, 사죄할 일도, 무릎 꿇을 일도 생겼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서강대 교수로 재직할 때만 해도 그는 정치할 생각이 없었다. 운명인지, DNA 때문인지 그의 삶은 정치로 스며들었고, 어느 순간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이 됐다.

삶이 역동적으로 바뀐 건 2012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대선 공약을 총괄하면서다. 이어 2016년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로 총선을 이끌어 원내 1당을 만들었다. 4년 뒤인 2020년엔 다시 보수당(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전신)으로 건너가 대선 직전인 2022년 1월까지 비대위원장과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잇따라 맡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했고, 문재인 대통령으로 정권을 교체할 기틀을 닦았으며,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도 도운 셈이다.

지금 그는, 그래서 두 번 사과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정권 창출을 성공시킨 두 전직 대통령이 실패했다고 진단해서다. 또 사과할 일이 생기면 기꺼이 그럴 각오도 돼 있다고 했다.

-세 번이나 정권 창출을 도왔죠.

“박근혜를 도울 때가 72세, 문재인 도울 때는 76세, 이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을 할 때는 82세였어요. 정권교체의 기반을 두 번 만든 거죠.”

-그런데 그중 박근혜ㆍ문재인 정권은 실패했다고 보시는 거죠.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정직하지 않아요. 뭣보다 자기가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아.”

-사람을 잘못 봤다고 회고록에 쓰셨더군요.

“나는 대통령이 될 사람은 탐욕이 없고 주변(가족)이 단순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전 정권들에서 측근 비리가 문제 됐으니까. 그 기준으로 보면 박근혜란 사람이 대통령에 딱 들어맞잖아요. 2008년 나를 찾아와 ‘대통령이 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처음 말했고, 2012년엔 당에 들어가서 비대위원을 하면서 총선을 도왔죠.”

-당 혁신도 이끌었고요.

“그때 당 정강ㆍ정책에서 ‘보수’란 단어를 싹 빼자고 했더니, 당에서 들고일어나서 이 문제는 (‘발전적 보수’에서 ‘보수적 가치’라는 표현으로 바꾸기로) 양보했지만,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는 문제는 물러설 수 없었어요. 총선이 끝나고 자기들이 검토해보니 그것 때문에 승리한 것으로 판단되니까 대선 때도 나더러 도와달라고 한 거죠. 박근혜 후보에게 당선이 되면 경제민주화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받고 대선 공약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그러나 대선까지 순탄치 않았다. 선대위 내부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후보 측근을 중심으로 반대론이 들끓었다. 심지어 공약을 총괄한 그와 상의도 없이 핵심 공약이 빠지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그가 캠프에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언론에도 비상한 분위기가 보도됐다. 그러는 사이 상대인 문재인 후보와 지지율 격차는 점차 줄었다. 박 후보 쪽에선 지지 의사를 표명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 실천 약속을 믿는다고 밝혔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속은 게 됐죠. 심지어 탄핵으로 정권이 마무리됐어요.

“이미 인수위 때 경제민주화는 (국정과제에서) 싹 지워버렸어요. 그때 ‘이 정권이 잘도 가겠다’ 싶었지. 설마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겠나 했는데 나를 속여먹은 거예요. 게다가 그 옆에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같은 사람이 있을 줄 상상이나 했나.”

-한 번 배신당하고도 또다시 민주당의 대선을 도운 건 왜인가요.

“당시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하는 바람에 당이 쪼개졌잖아요. 야당이 몰락하게 생긴 거죠. 2016년 총선 전에 어떤 얘기까지 나왔냐면, 당시 새누리당이 180석은 충분히 얻을 거라는 전망이었어요.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가 장기 집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봤어요. 야당이 말살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정치도 여야가 경쟁해야 발전해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정치가 큰 원인이었어요.”

-문재인이란 정치인은 좀 달라 보이던가요.

“2016년 1월 사흘 연속으로 날 찾아왔어요. 박근혜는 배반했지만 자신은 경제민주화를 꼭 실천할 테니 도와달라고. 그런데 문재인도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총선에서 1당을 만들어줬지만, 그 뒤로 감사하단 전화 한 번 안 했어요.”

-연달아 배신을 당한 건데.

“배신감이 들었죠. 물론 그때 기분은 나쁘지만, 감정은 지나가는 거예요. 또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어 봤자 분통 터져서 내 건강만 나빠지지.”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총선 뒤) 내가 두려워진 거겠죠. 원내 1당을 만들어 줬으니, 혹시 자기 위치가 불안정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 두 번의 정치적 선택은 실패로 끝난 거네요.

“그러니까 내가 국민 앞에 두 번 사과해야 한다고 했죠. 알고 보니 근대 국가를 이끌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인 줄 내가 알지 못했는데 어쩌겠어.”

-대통령이 되면 왜 그렇게 달라진다고 보세요.

“대통령이 되면 자신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어요. 황홀경에 빠지는 거예요. 그 황홀경에서 빨리 빠져나오면 임기 동안 일을 좀 할 수 있는 거고,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리면 일을 못 하는 거예요.”

[실패③] 윤 대통령, 실패 안 하려면

한국일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20년 8월 19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 5ㆍ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 광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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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김종인’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광주 5ㆍ18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일이다. 5ㆍ18 정신을 폄훼하는 당 인사들의 망언으로 여론의 질타가 집중될 때다. 여든의 그는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어나다 휘청였고, 사죄문을 읽는 도중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목이 매기도 했다. 당의 잘못, 그러니까 실패를 대신 사과한 것이다.

-비대위원장으로서 당의 잘못과 전신 정권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신 사과했죠.

“국민의힘이 과거 전신 정당, 정권과 단절하지 못했어요. 매듭을 지어야죠. 내가 대표로 대신 인정하고 사과하는 수밖에.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받았다는 건, 당도 탄핵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과오와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려 하는데도 당내에서 반대가 많았지. 지금은 정권을 잡았으니 다들 자기가 잘나서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정은 한심했어요.”

-정치의 반성, 실패의 인정이 왜 중요한가요.

“그때까지 그런 반성을 해본 정당이 없어요. 반성하고, 실패를 복기해야 반복하지 않을 거 아녜요. 그런데 정치인들이 그걸 안 해요.”

뿐만 아니라, 당시 그는 “1980년 5월 17일 저는 대학 연구실에서 밀려 있는 강의 준비에 열중했었다. 광주 희생자 발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알고도 침묵하고 눈감은 행위의 소극성 역시 작지 않은 잘못이다.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것도 유죄다”라고도 밝혔다.

-개인적인 참회를 한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시인할 건 시인해야 풀어지니까요. 그걸 자꾸 부정하려고 하면 안 돼요. 국민 앞에 사과할 때는 솔직해야 해요.”

-그간 정권들을 보면, 전임 대통령이나 정부의 실패를 활용해 치적을 만들려고 해왔어요. 반면 자신들의 실패나 잘못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요.

“그러다가 꼴이 이상하게 되는 거예요. 그건 다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지. 현재와 미래를 보고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과거를 봐요. 최근 ‘난방비 폭탄’ 문제만 해도, 가스요금이 올랐으면 그만큼 서민에게 보조해준다는 얘기만 하면 되지, 전 정권 얘기를 왜 해요. 아무리 전 정권 (에너지 포퓰리즘) 탓이라고 해봐야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아요.”

상대의 실패를 지렛대로 성공하는 정치엔 희망이 없다.
한국일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당 중앙선거대책위 회의에서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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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 여당도 그럴 조짐이 보인다는 거군요.

“야당은 여당의 잘못을 먹고 살아요. 그게 야당이에요. 그러니 야당이 여당에 알아서 협조해주기 바라는 건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든 야당을 구슬리고 설득해서 뜻하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해야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야당이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을 못 한다고 아무리 주장해본들 선거에 도움이 안 돼요. 집권자로서 역량을 발휘해 일을 해야지. 국민은 냉정해요.”

-윤석열 대통령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싫은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해요. 대통령이 자기 생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실패가 시작돼요. 대통령이 모든 걸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요. 권력은 겸손해야지, 오만하면 성공하지 못해요.”

그는 갑자기 “지금 윤 대통령이 조심해야 할 게 뭔지 아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이야 국회 다수의석을 야당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정권 초반에 실적이 없어도 국민이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년 총선에서도 실패를 하면 진짜 윤석열 정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부가 될 거예요. 민주사회에서 입법기관이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 냉정하게 봐야 해요. 대통령이 됐다고 의회도 내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민주사회에서 민의를 이기는 권력은 없어요.”

-대선 뒤 윤 대통령이 연락한 적 있나요.

“그래도 윤 대통령이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나은 면이 뭐냐면, 당선된 후에 고맙다고 전화를 하더라고. 그게 다른 점이에요.”

-무슨 말을 해주셨나요.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했어요.”

-만약, 이 정부도 실패하게 되면…

“문재인 정권에서 윤석열 정권으로 교체될 기반도 내가 만든 거니까… 실패하면 그때 가서 또 사과해야지. 실패는 실패니까.”

그는 조부인 가인 선생이 77세의 나이인 1962년 말 5ㆍ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대항할 야권 통합 정당인 민정당 창당을 주도할 때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연로한 데다 몸도 불편한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말리자 가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치인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숙명처럼 맡게 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 말씀의 진의가 언제 이해되던가요.

“나도 그렇게 된 거죠. 내가 양당 비대위원장을 다 한 게 결국은 숙명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으니 하게 된 거예요. 내가 자진해서 해본 적은 없어요.”

[실패④] 대선 출마로 개헌 화두 던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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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전 9시면 사무실로 나온다. 자택에서 CNN과 유로뉴스부터 국내 일간지까지 다 본 뒤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ㆍ중 관계, 리글로벌라이제이션(재세계화)이나 디글로벌라이제이션(탈세계화)이 우리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야 하니 읽을 게 많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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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도 있다. 2017년 4월이었다. 그는 중도세력을 기반으로 한 ‘통합 대통령’을 꿈꿨다. 분권형 개헌으로 2020년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도록 자신의 임기는 3년으로 줄여 과도기적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랜 꿈인 경제민주화와 개헌을 이루려는 승부수였다.

-직접 대선에 나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죠.

“그때 내가 출마를 선언한 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우리나라 정치에 큰 변화가 없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래서 개헌을 화두로 던지려고 출마 선언을 한 건데, 여건이 안 됐죠.”

-일주일 만에 다시 불출마 선언을 했어요.

“우리는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들이니까. 안 되는 건 접어야지.”

-뭘 보고 그렇게 빨리 판단을 한 건가요.

“그때 문재인ㆍ안철수가 (야권 후보로) 경쟁을 할 때 아니요. 한때 두 사람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기도 했고. 그걸 보면서 개헌이라는 의제는 물 건너갔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니 집어치운 거지.”

-정치는 어떻게 해야 실패가 없을까요.

“정치가 특별한 게 아니에요. 상식에 맞게 하면 돼요.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죠.”

-정치인은 어떤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이렇게 불평등이 심한 세상에 약자를 편드는 역할을 해야지. 강자만 쫓아다니는 건 인간답다고 보지 않아요.”

-요즘도 정치인들이 많이 찾아오지요.

“급하면 오지. 내가 필요하면. (웃음)”

-무슨 말을 해주시나요.

“정치를 왜 하느냐고, 그 이유에 확신이 있느냐고 물어요. 대통령 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와도 그걸 묻죠.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을 할 때(2001년 1월) 나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거예요. 처음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나’ 싶어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두 번째 만났을 때 돕기로 약속했어요. 왜 대통령을 하려고 하는지 물어보니 불균형한 대한민국을 바로잡는,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도 여러 번 만나 조언을 했어요.”

그는 노 대통령 당선 이후 청와대 원로분과회의에도 참여했지만, 점차 대통령과는 멀어졌다. 그는 “노 대통령은 ‘당선이 되면 김종인 같은 분을 총리로 모시겠다’고 한 적이 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만났을 땐 ‘저희와 코드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했다. 회고록에 그는 “순수한 노무현이라는 개인이 ‘저희’로 탈바꿈한 순간”이라고 썼다.

-아직 이루지 못한 정치적 꿈이 경제민주화와 내각제 개헌인데요.

“정치 권력이 재계의 눈치를 보니까 못 하는 거예요. 내각제 개헌도 다들 대통령이 되면 그저 그 권한으로 5년간 마음대로 해먹으려고만 하니 못 하는 거고. 하지만, 언젠가는 다 될 거요. 대통령제를 이미 75년 동안 해봤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아녜요.”

-내각제로 개헌한다면, 현재 정치의 난맥상이나 정치 실종, 줄줄이 실패하는 대통령의 문제가 해소될까요.

“지금 국회 수준으로 내각제를 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제도가 바뀌면 사람도 바뀔 수 있어요.”

-언제 개헌에 불이 붙을 거라고 보시나요.

“내년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거론될 수도 있다고 봐요.”

여당이 참패를 하면, 윤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들렸다.

-마지막 정치적 꿈이 있나요. 내각제하의 총리랄지.

“지금은 어떤 자리에도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누가 또 찾아와서 ‘이런 대통령이 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읍소하면요.

“지쳐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더 속을 수 없어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은 경륜과 경험으로 실패란 걸 정의해본다면 뭘까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만들려면 실패를 제대로 분석해야지. 맹목적으로 ‘위기다, 위기다’ 말만 해 봤자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요. 위기를 닥치게 한 요인을 파악해 변화 시켜야지. 실패는 변화의 동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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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시기, 양당의 중책을 오간 그는 “매번 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꾸는 마지막 꿈은 평생 신념인 내각제 개헌과 경제민주화 실현이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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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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