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가운데 하나인 영릉(永陵)의 전면 전경. 무덤을 두르는 돌인 사대석이 없다. 문화재청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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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 왕릉 크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작아진 것으로 확인됐다. 왕과 왕비의 무덤의 지름이 최대 3m 가까이 줄어들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40개소 58기의 봉분 크기와 높이, 간격, 과거 정비 사례 등을 직접 현장 조사해 ‘조선왕릉 봉분 및 능침지반 연구’ 보고서를 21일 내놨다. 이번 조사에서는 봉분 주변에 설치된 병풍사대석, 사대석 등 석물 일체도 연구됐다.
봉분은 ‘봉하다’ ‘감싸다’는 의미를 갖는 봉(封)과 무덤을 뜻하는 분(墳)이 결합된 한자어로 ‘봉분’은 죽은 이의 몸을 땅에 묻은 뒤 쉽게 다시 열리지 않도록 흙을 쌓아 올린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 가운데 하나인 융릉에서는 봉분을 둘러싼 병풍사대석이 보인다. 2012년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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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초기 왕릉은 왕과 왕후의 관을 묻는 구덩이인 지하 현궁을 대형 석재를 사용해 넓은 석실로 만들었다. 그래서 봉분의 지름이 32∼35자(약 9,856~10,780mm) 정도로 컸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현궁을 석재 대신 황토와 모래, 석회 등을 이용한 회격(관을 놓는 자리)으로 조성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봉분의 지름이 점차 줄어들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현궁을 두 개의 석실로 조성한 합장릉을 제외한 봉분은 지름이 25자(약 7,700mm)까지 감소했다.
또 봉분 주위의 석물에 따라서 봉분의 지름이 변화했다는 사실이 관찰됐다. 먼저 왕릉 주위에 두르는 병풍석을 갖춘 사대석을 갖춘 왕릉은 비교적 봉분 높이가 높아졌다. 반면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는 난간석만 갖춘 왕릉은 봉분의 지름이 넓어지고 높이는 낮아졌다. 사대석은 봉분의 영역을 명확하게 하고 봉분이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쌓은 돌 구조를 말한다.
이외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후대에 왕의 칭호를 받거나(추존), 왕실에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왕과 왕후의 무덤은 조선 시대부터 관리가 소홀했다는 점이 확인됐다. 또 조선 초기에는 봉분 사방으로 미세한 경사면을 조성하는 한편, 무덤을 둘러싸는 나지막한 담에 배수로와 배수구, 배수홈 등을 설치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후면에서 전면으로 경사면을 적극적으로 조성해 배수체계를 발달시켰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조선은 왕과 왕후의 무덤의 크기를 '예서'에 정리해 제도로서 규정했는데 이를 ‘봉릉 제도’라 부른다.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 봉릉제도는 대대로 엄격하게 지켜졌다. 왕이 직접 무덤의 규모에 대해 지시를 내린 기록도 남아 있다. 예컨대 세조는 1468년 죽음을 앞두고 ‘현궁은 석재로 만들지 말고, 지상의 봉릉에도 병풍사대석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교를 남기기도 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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