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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공공요금 인상 파장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난방비 포퓰리즘 비판은 진보·보수 아닌 상식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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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폭탄’ 불만 파고드는 거리 시위



중앙일보

서경호 논설위원


지난 4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윤석열 정권 민생파탄 검찰독재 규탄대회’.

검찰 수사를 받는 당 대표를 지키겠다며 ‘이재명과 나는 동지다’라고 인쇄된 파란 색 풍선을 흔드는 지지자들이 많았다. ‘검사 독재’ 비판과 함께 난방비 폭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민주당에서 준비한 여러 가지 손팻말 중에 이재명 대표가 골라 손에 든 것도 ‘윤석열 정권 난방비 폭탄 못살겠다!’였다. 이날 민주당 집회 직후, 진보단체가 모인 ‘촛불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25차 촛불대행진’이 같은 장소에서 이어졌다. 시공간이 겹치다보니 참석자도 뒤섞였다.

거리에선 에너지요금 인상 반대 주장도

중앙일보

4일 서울 남대문과 시청역 사이 대로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장외 집회. 이재명 당 대표가 의원들 사이에 앉아 ‘난방비 폭탄 못살겠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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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노동자연대’라는 신문이 호외를 나눠주고 있었다. 신문 1면의 ‘전기·가스 요금 인상 반대한다’는 큰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떤 신문인지 홈페이지에 가봤더니, 마르크스주의로 세계를 분석하고, 주류 언론이 대변하지 않는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소개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궁금해서 신문을 펼쳐봤다. 주장인즉슨, 전기·가스·수도·대중교통 같은 필수 공공서비스는 정부가 지원해야 하고 세금으로 공기업 적자를 메우라는 거였다. 재원은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를 줄여서 기업과 부유층에게 더 걷으면 된다는 건데, 부자기업에 매기는 세금(법인세)도 결국 주주와 임직원들이 부담하게 된다는 걸 무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부자기업이지만 지난해 3월 기준으로 개인 주주가 547만 명에 달한다. ‘노동자연대’를 읽는 노동자 중에도 얼마든지 삼성전자 주주가 있을 수 있다.

민감한 난방비 이슈라는 먹잇감을 진보단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민주노총은 지난 1일 집회에서 난방비 등 공공요금 인상 반대와 횡재세 도입을 주장했다. 진보당은 ‘어이없다 내 난방비 모이자 서울역!’이라는 플래카드를 시내 곳곳에 내걸고 이번 주말 시위를 예고했다.



난방비 불만 부추기는 진보단체

여야 정치권 수조원대 추경 거론

밀린 숙제 늦게 하다 생긴 성장통

“요금정상화, 힘들어도 가야 할 길”

중산층까지 지원하는 건 포퓰리즘

에너지 다소비 생활부터 바꿔야

지난 정부의 과도한 요금 억제

중앙일보

4일 서울 남대문 집회 현장에서 호외로 뿌려진 ‘노동자연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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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이슈는 복잡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서 억지로 억눌렀던 전기·가스 요금으로 공기업 부담이 임계치를 넘어섰다. 국내외 가격차를 감안할 때 요금 현실화는 불가피하다. 밀린 숙제를 뒤늦게 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성장통 같은 거다.

난방비 고지서를 받고 뒷목 잡는 이들이 많다. 단독주택에 사는 한 지인은 지난달 2인 가족 난방비가 50만원이 나왔다며 울상이다. 정부가 서둘러 취약층에 난방비를 지원하는 1, 2차 대책을 내놓은 건 당연했다. 윤석열 정부는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약자를 보듬는 ‘따뜻한 동행’을 함께 내걸었다. 난방비 대란 속에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살피는 건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난방비 대책에 중산층까지 포함할지 정부가 고민하고 있어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중산층과 서민의 난방비 부담을 경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중산층 지원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 국민 대다수에게 가격 보조를 하게 되면 가스나 전기 요금을 현실화해 수요를 줄이고 에너지 절약을 유도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와 어긋나고 수요관리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 ‘타깃을 정해 일시적으로만 지원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조언을 새겨들어야 한다.(기타 고피나스 IMF 수석 부총재)

중산층까지 지원하려면 추경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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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시내에서 열린 민주노총 시위에서도 난방비 폭탄이 화두였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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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선 이미 ‘난방비 포퓰리즘’이 넘실댄다. 더불어민주당은 80%의 국민에게 가구당 최대 40만원을 현금으로 주자는 안을 냈다. 여기에만 7조원 넘는 재원이 필요하니 30조원 추경을 하자는 거다. 일부 여당 의원도 나섰다.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은 모든 가구에 3개월간 10만원씩 지급하는 6조원대 추경안을 제안했다.

중산층까지 난방비를 지원하려면 대략 10가구 중 여섯 가구에 돈을 줘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통계청이 주로 쓰는 기준으로 중산층 비중(처분가능소득 중위소득 50∼150%)은 2021년 61.1%였다. 난방비 1, 2차 대책보다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해 추경이 불가피하다.

추경은 여전히 5%대인 고물가에 부담이 되고 1000조원대인 국가채무를 더 늘린다.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지난 정부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나 국민 대부분에 나눠준 국민지원금에 비판적인 게 지금 정부 아니던가. 한덕수 총리는 7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현재 재정 사정으로는 취약층 지원에 집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난방비 추경에 반대하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대통령 발언의 무게를 경제관료가 어느 정도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부는 전기·가스요금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해 2026년까지 한전 누적 적자와 가스공사의 미수금을 해소한다는 정상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난방비 폭탄’에 정부가 여론 눈치를 볼 것 같아 걱정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산업자원부 장관은 “에너지 정책은 장기 이슈여서 이념이나 정쟁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며 “단기 이슈에 흔들리지 않도록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금 정상화는 힘들어도 꾸준히 가야 할 방향”이라며 “지금처럼 우리 기업과 가계가 에너지를 많이 쓰면서 탄소 중립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유럽처럼 가스료 8배 오른 것도 아닌데

전문가 얘기도 비슷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유럽처럼 가스요금이 8배 뛰었다면 재난수준이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지난해 38% 올랐을 뿐”이라며 “재난수준이라면 중산층까지 지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취약층 지원이 맞다”고 말했다. 취약층 지원은 정부 대책에 나오는 지난해의 두 배에서 세 배 정도로 늘릴 필요는 있다고 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12~2월 석 달간의 지원은 필요해서다. 유 교수는 “지금의 에너지난은 2025년까지 이어질 것인 만큼 내복 입고 난방온도 낮추는 등 에너지 다소비의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중산층까지 지원금을 확대하면 ‘지금처럼 마구 써도 되는구나’하고 착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에너지 고물가 시대, 기본은 절약이다’ 등 난방비 포퓰리즘을 지적하는 사설을 써왔다. 한겨레도 ‘중산층까지 난방비 지원, 에너지 정책 꼬이게 만든다’는 사설을 썼다. 다른 언론도 비슷하다. 난방비 포퓰리즘 비판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가 난방비 이슈를 어떻게 처리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한전은 적자, 가스공사는 미수금 왜? 회계처리 차이일 뿐

증권가에선 한국전력이 지난해 31조원의 영업적자를, 한국가스공사는 2조원에 육박하는 영업흑자를 낼 것으로 추산한다. 에너지 기업이 요즘 힘들다는데 왜 가스공사는 흑자일까. 비밀은 가스공사의 미수금 계정에 있다. 가스공사 미수금은 지난해 말 9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과 가스공사는 원유나 천연가스를 도입해 전기와 도시가스를 판매한다. 원가보다 싸게 팔면 적자를 보는 구조다. 김종갑 전 한전 사장이 재직 때인 2018년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다”며 전기요금 현실화를 주장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한전이 전기를 원가보다 싸게 팔아 손해를 보면 당해 연도 적자로 기록한다. 반면 가스공사는 원가보다 싼 매출액만큼을 나중에 받을 돈(미수금)으로 회계처리한다. 한전은 적자로 인식하지만 가스공사는 자산으로 쳐주는 셈이다. 실제로 미수금이 쌓여도 결국은 해결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서민 생활 안정과 물가 관리를 위해 정부가 공공요금을 동결했다. 가스공사 미수금이 2012년 말 5조5000억원까지 쌓였다. 하지만 2013년부터 원가를 반영하기 시작해(원료비 연동제 복귀) 2017년 누적미수금을 다 회수했다.

다시 미수금이 9조원까지 쌓인 건 문재인 정부 탓이다. 2018년 유가와 환율이 오르자 원료비 연동제를 유보했다. 도입단가가 오르는 데도 민수용 도시가스 가격을 2020년 7월부터 2022년 3월까지 20개월간 동결했다.

정부가 가스공사에만 미수금 계정을 쓰도록 허용한 건 일종의 특혜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었다. “전기요금은 중앙정부가 결정하지만 도시가스 요금은 지자체가 결정한다. 선거철이면 지자체장들이 요금 동결을 공약으로 내걸곤 한다. 그래서 도매가격을 못 올려 적자를 보면 경영평가 등에 불리해지고 해외 구매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국제회계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정부가 가스공사에 미수금이라는 외상값 계정을 허락한 것이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전은 국제회계기준을 지켜야 해서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

어차피 나중에 해결된다고 미수금을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다. 쌓이는 이자만큼 국민 부담은 더 커진다. 회계상 흑자기업이라고 정부의 2차 난방비 대책을 가스공사 부담으로 넘긴 건 고육책이겠으나 정공법은 못 된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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