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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미디어세상] 부끄러운 문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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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값이 싸서 문제라고 한다. 인터넷 매체에 기고하는 글은 물론이고 주요 일간지에 한 바닥을 써도 품삯이 형편없다고 불만이다. 뜨거운 정치 평론이나 시론은 그나마 인사치레를 겸해서 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쿨하게 쓴 분석이나 서평은 오히려 대접이 싸늘하다. 번역은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론매체에 기고문을 준비하면서 조사를 많이 할수록 손해라는 인식도 있다.

경향신문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시장논리로 이 문제를 해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 당신이 아니더라도 언론이 요청하면 쓰겠다는 글쟁이들이 줄 서 있다고 한다. 둘째, 인터넷 매체에 떠다니는 유사한 내용의 글이나 영상물을 본 시민들이 당신 글을 돈 내고 읽겠냐는 것이다. 이런 해명들은 어쩐지 설득력이 있어서 자기 글에 값 매기는 일이 민망한 작가들은 품삯 흥정에 주저한다. 그래서 글값은 다시 후려쳐지고 흥정하지 못하는 글쟁이는 시장을 떠난다.

적나라한 해명이 사안을 해소하고 사태를 해체하는 경우라 해야 할까. 해명에 휘둘리지 말고 살펴보자. 나는 어려서 동아·조선에서 칼럼을 요청받고도 원고료를 놓고 흥정했다던 전설 같은 기고자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그게 글값에 대한 흥정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기고자의 문단의 지위에 대한, 정치적 위세에 대한, 그래서 우리가 데려온 사람이라는 세간의 인정에 대한 보상이라고 본다.

주요 언론사의 외부 필진 명단을 보자. 글쟁이로 명성이 자자한 분들도 있지만, ‘오 이런 분도 쓰는구나’ 싶은 경우도 있다. 명단 전체를 놓고 보면, 이미 각종 매체에서 읽히는 글을 쓴다고 확인된, 즉 ‘글값을 하고도 남는’ 작가들은 소수다. 무슨 대학교 선생, 어느 법무법인 직원, 언제 등단했다는 시인 등 그 프로필 사진만큼이라도 재미있게 쓰면 다행이겠다 싶은 분들이 다수다. 앞서 말한 적나라한 해명 때문에 또는 다른 보상 때문에 애초에 글값을 후려쳐 모신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다른 기회에 풀기로 하고 해석만 하나 더하자면, 나는 ‘문필 공화국’이 빈약해서 벌어지는 일이라 본다. 글쟁이가 적고, 읽히는 글쟁이는 더욱 귀하다. 왜냐하면 읽는 자들(이들 중 왕눈이가 곧 잠재적 글쟁이인데)이 애초에 적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읽히는지, 누가 무엇을 쓰는지, 내가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지 못한 채 쓰기는 하는데, 그 일로 보상받지 못한다. 읽히는 글을 쓰는 자를 천대하는 풍조도 문제다. 새로운 문체, 장르, 그리고 사상으로 인터넷 유료 플랫폼, 드라마 공모전, 그리고 무료 교류매체에서 이미 필명을 날리는 글쟁이들이 있다. 창작이든, 번역이든, 번안이든, 아니면 동영상이든 이미 선수들끼리는 아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반대로 이런 사정을 외면하는 일이 체면치레가 되고, 그래서 재미없는 글을 잘도 써대는 자들이 오히려 작가 대접을 받는다.

마리우스 잰슨에 따르면, 일본 17세기 막부시절에 이미 아사이 료이와 같이 글을 써서 먹고사는 작가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들은 읽힐 만한 소재라면 무엇이나 썼으며, 또한 알기 쉽게 썼다. 예컨대 이하라 사이카쿠의 끝도 없는 이야기들은 주제도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문체가 발군이었으며, 곁들인 그림도 독자를 사로잡았다. 잰슨은 일본의 근대 문화의식을 형성하는 데 통속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유통한 서민매체가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문필 공화국이란 서로 읽고 참조하는 잠재적 글쟁이들의 연결망이다. 이 공화국에서 다른 지위나 위세는 소용없고, 오직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는지가 중요하다. 그곳은 또한 서로 읽는 자들의 나라이기에 얼마나 읽혔는지 관건이 된다. 읽히는 글이 명성을 만들지 못하고, 다른 요인들이 글쓰기 기회를 만드는 여기 이 나라에서 글값을 논하자는 게 부끄럽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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