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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숨] 이야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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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음악가 동료들과 작은 타악기를 연주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그 그림책 안에 연주를 위한 기호를 그려 넣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잘 어울리는 소리를 연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이야기에 짧은 연주를 곁들여보는 접근이 가능한지 실험해 보는 정도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주를 틈틈이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느슨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경향신문

신예슬 음악평론가


소리 구성이야 늘 해왔지만 이야기 구성이라고는 경험이 없던 우리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뼈대를 만들어 어떻게든 살을 붙여봤다. 이야기라면 주인공이 있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넣을 자리가 필요하니까 소리를 좋아하는 캐릭터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소리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조용한 호숫가에 살던 개구리 ‘차차’가 심심한 마음을 달래고자 밖으로 나서고,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만나며 크고 작은 소리를 내게 된다는 내용을 만들었다. 필요한 장면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이야기가 이렇게 만들어져도 되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프로젝트를 멈춰두었을 때쯤, 우리는 한 그림책 서점을 찾아가 자문을 받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왔느냐는 물음에 동료가 우리의 이야기를 쭉 읊었고, 서점의 대표님은 우리의 주인공이 왜 그런 모험을 시작한 것인지, 그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지금 이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당연히, 연주를 넣기 위해 만든 그 이야기에는 구멍이 많았고, 그런 질문을 받고서야 우리가 만든 것이 아직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몇백년을 살아남아 지금까지 도착한, 몇 번이고 다시 말해져도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있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아주 튼튼한 이야기 중에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개입하며 함께 다듬고 고쳐온 것이 많고, 시작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만든 이야기가 마침내 완성되는 데까지 수백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라고 덧붙였다.

완성되는 데 수백년이 걸리는 이야기라니. 자문을 받으러 오기 전까지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짓는 일을 일순간 큰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과거로부터 몇백년을 지나치며 오늘에 도착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되뇌었고, 지금 들리는 소문처럼 여러 사람 사이를 떠도는 이야기 중 어떤 것이 긴 시간을 지나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서사로 자리잡는 일을 상상했다. 어딘가에서 떠다니는 말이 실처럼 엮이며 이야기라는 직물을 만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야기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며 변화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예술계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공연과 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반복되는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운 모래바람처럼 미세하고 여린 음들로만 이루어진 음악, 여러 재료가 울퉁불퉁하게 이접되어 있는 음악, 전시장 곳곳에 놓여 있는 돌과 광물의 이미지, 반복되는 비평의 언어들. 분명 서로 다른 이들의 작업이었지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하나의 긴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고 그 각자의 작업들은 언젠가 완성될 이야기 속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반복되고, 변형되며, 끊임없이 다듬어지며 우리에게 도착한 어떤 과거의 음악들과 지금 막 작은 파편들을 새로이 만들고 있는 지금의 풍경. 이것들이 모여 만들어질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야기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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