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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취재파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3년, 갑질이 갑질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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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 잃을 결심으로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직장 내 괴롭힘 제보자 A 씨를 만나기 위해 경남 김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이유는 이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15년 넘게 일하던 제약회사에서 퇴직한 이후 어렵게 구한 직장. 수행기사라는 업무가 낯설기도 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니 어떻게든 유연하게 버텨보려 안간힘을 썼을 겁니다. 그는 지난 1년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시간이었다며 자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선친 묘소 관리, 쑥뜸 뜨기"…머슴 같았던 '수행기사' 생활



경남 김해의 한 플라스틱 제조업체 창업주를 수행하는 업무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한 시간 거리인 창업주의 선친 묘소를 관리해야 했는데, A 씨는 그 규모만 1천 제곱미터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단순 풀 뽑기는 물론 묘목을 심고 약을 치는 등 계절이 갈수록 해야 할 일도 늘었습니다. 건강에 쑥뜸이 좋다는 이유로 뜸을 배워서 직접 뜨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블루베리 나무 160주를 키워서 수확하도록 하고, 집안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물론 각종 청소까지 모두 A 씨 몫이었습니다. 기사에 담지 못한 '갑질'은 더 많았습니다. "수행기사니까 어느 정도 심부름은 감수하려고 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인간으로도 안 보는 것 같았다." A 씨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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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창업주는 "A 씨가 자발적으로 몇 차례 한 적은 있지만 강요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선친 묘소 관리 역시 차에서 휴식을 취하던 A 씨가 '지루하다'며 스스로 풀 뽑기에 동참했다는 겁니다. 쑥뜸의 경우에도 자신의 건강을 걱정한 A 씨의 동의를 받아 이뤄진 일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A 씨의 자진 의사로 이뤄진 일일 뿐, 강요나 압박은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해당 창업주는 기자에게 보낸 해명 글 맨 위에 "수행 修行 : 윗사람을 따라서 감, 관리 管理: 정기적으로 관할하고 처리함" 이라고 썼습니다. 수행기사 A 씨의 업무는 '윗사람'인 자신을 보좌하는 통상적이고 적절한 업무였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듯 했습니다. 해당 창업주는 '향후 시정할 일이 있으면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회사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언론에 제보한 택한 A 씨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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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사라서? '괜찮은 갑질'은 없다



이진아 노무사는 이 사례에 대해 "전형적으로 수행기사들에게 발생하는 갑질의 유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대표이사의 수행 업무라 함은 개인의 사적 일까지 다 돌보라는 의미가 아니고, 대표가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전하는 것이 수행기사의 업무 범위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고용노동부 역시 반복적 개인적인 심부름 시키는 일처럼 부탁의 수준을 넘어 행해지는 사적 용무 지시는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행위로 보고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나와 똑같은 인격체라는 기본을 잊는 순간, 일터의 불행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희원 기자(jess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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