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성수대교사고희생자 위령비의 지난해 12월 13일 모습. 위령비는 사고가 일어난 성수대교를 바라보고 있다. 석경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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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57)씨는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 졸지에 아버지를 잃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이날 자가용을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 출근하던 중 무너진 콘크리트 다리와 함께 추락해 변을 당했다. 최씨를 비롯한 사고 희생자 32명의 유족은 매년 기일(10월 21일)이 되면 성수대교 북단에 위치한 희생자위령비를 찾아 고인을 기린다. 최씨는 “아버지를 기리며 위령비를 자주 찾고 싶지만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로 길이 위험해 포기할 때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12월 13일 기자는 성수대교를 마주 보고 있는 위령비를 직접 찾아갔다. 최씨의 말처럼 가는 길은 험난했다. 지하철 서울숲역에서 출발해 지도 앱을 쫓아가다 보니 서울숲 산책로 한가운데서 길이 끊겼다. 인근에 있는 서울시 성수동 한강 사업본부 직원에게 가는 방법을 물었다. “사람이 걸어갈 수 없다. 위령비 주위가 차도로 둘러싸여 다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
한강사업본부 정문 6차선 차도 옆 갓길로 4분 정도 걸었다. ‘성수대교 위령비 주차장’이 보였지만 보행로가 없어 2차선 차도를 가로질러 무단 횡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끝이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1차선 차도를 한 번 더 무단 횡단한 뒤에야 위령비에 도착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려 조성한 공간인데도 추모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수대교사고희생자위령비를 도보로 찾아가기 위해선 서울 성동구 한강사업본부 정문부터 2차선 차도 옆 갓길로 수백미터를 걸어야한다. 석경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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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慰靈碑)라는 게 그날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더 안전한 세상을 다짐하면서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조형물이다. 기자와 동행한 김명식 건축가는 “성수대교 위령비는 방치되고, 잊히고 버림받은 단절의 공간"이라며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추모 공간의 핵심인데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건축가는 “위령비는 재발 방지의 의미까지 담고 있어야 한다"며 "홀로 떨어져 있고 유족조차 잊어버리게 하려는 추모 시설은 반성과 교훈이란 측면에서 거리가 멀다"고 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다룬 중앙일보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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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참사 계기로 지어진 건물엔 사고 기록 無
57명의 생명을 앗아간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의 유족들은 참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인현동 사건은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의 한 호프집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인해 청소년 57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이다. 희생자 대다수가 10대 중·고등학생이었다. 화재 당시 호프집은 소방법 위반 등으로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불이 나자 호프집 주인은 ‘학생들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 봐’ 문을 잠그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인현동 참사 현장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사고 5년 후인 2004년 들어섰다. 청소년들이 호프집 등을 방황하면서 빚어진 인현동 화재 참사를 반성하며 그들에게 건전한 문화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설립했다. 지난해 12월 10일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을 방문했다. 이용 학생들에게 인현동 화재 참사와 추모비에 관해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한 학생은 없었다. 화재 참사 때문에 생긴 시설을 이용하면서도 참사 자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모비는 일부러 찾지 않고서는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있었다.
1999년 인현동화재참사로 고등학생 자녀를 잃은 이금우(78·왼쪽)씨와 이재원(72·오른쪽)씨가 지난해 12월 10일 추모비를 둘러보고 있다. 석경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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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남기겠다… “우리 죽으면 잊힐 거 아니냐”
1999년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를 다룬 중앙일보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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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은 관련 자료들을 모아 사건의 진상과 실체를 공적 기록물로 남기려고 노력 중이다. 이재원(72)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은 당시 화재로 17살 아들을 잃었다. 그는 “세월이 좀 더 흐르면 그날의 비극은 망각되고 추모비마저 흉물이라며 치울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의 자식들이 희생된 참사의 아픔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기록물이라도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재원(72) 인현동화재참사 유족회장이 지난해 12월 10일 인천 인현동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화재 참사 당시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다. 석경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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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은 ‘불량 청소년의 일탈’이라는 당시의 편견을 바로잡고자 한다. 참사 이후 청소년들이 호프집에 갔다는 이유로 유족들은 2차 가해를 당해야 했다. 뇌물을 챙긴 공무원 등이 불법 영업을 눈감아 줬던 어른들의 잘못은 가려졌다. 인현동 화재 참사 추모사업을 주최하는 장한섬 홍예문 문화연구소 대표는 “인천학생문화회관이 설립 취지대로 제대로 된 교육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선 책임을 단순히 청소년의 일탈로 면피하는 걸 바로잡는 기억의 공간이 따로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종수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형 참사라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지우고 싶겠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묻으려고 해서 묻히는 것이 아니다. 추모는 사는 사람들의 삶과 공존해야 한다. 추모를 공존을 위한 방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사회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명식 건축가는 "과거의 인재(人災)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탈피하기 힘들다"며 "추모 시설의 취지를 살리는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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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기억법 ③: 공유하다-‘참사의 도시’에서 ‘꿈꾸는 도시’로 … 안산 도심엔 노란리본 들어선다>가 이어집니다.
■ '추모와 실리' 두 마리 토끼 잡은 9·11 메모리얼의 비결
뉴욕 맨해튼 금싸라기 땅 1만평을 채우지 않고 비웠다.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폭심지)에는 마천루 대신 쌍둥이 인공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을 사방으로 둘러싼 동판에는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높이 9m에서 눈물 흐르듯 낙하하는 물은 이내 정사각형 심연으로 모여든다. 두 연못의 정식 명칭은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 한순간에 떠나간 희생자의 빈자리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공중에서 바라본 9·11 메모리얼 파크 전경.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있던 곳은 높이 9m 깊은 연못이 됐다. '국립 9·11 메모리얼&박물관' 페이스북 화면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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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폐허가 된 16에이커(약 2만평) 부지 중 절반의 공간에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2014년 정식 개장한 ‘9·11 메모리얼’은 박물관을 포함해 연간 1000만 명에 가까운 방문객이 다녀가는 뉴욕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이곳을 방문한 조종수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 모습이 공존하는 게 인상 깊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넓은 부지를 추모공간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아주 큰 결정이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욕의 명소로 자리매김한 9·11 메모리얼이지만 사업은 간단치 않은 상황에서 출발했다. 부지는 부동산 업자 래리 실버슈타인과 뉴욕/뉴저지 주 항만청이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실버슈타인은 상업시설을, 시 당국과 희생자 단체는 추모 공원을 최대한 확보하고 싶어 했다. 대규모 재개발의 영향을 받는 인근 주민과 상인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희생자 추모와 임대 수익 확보라는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시민들이 움직였다. 2002년 5000여 명이 모인 ‘리스닝투더시티’라는 공청회가 열리고 생중계됐다. 뉴욕 시민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단체 ‘이매진 뉴욕’은 230번의 소규모 워크숍을 열어 사업 관계자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9·11 테러 20주기를 맞은 지난 2021년, 한 여성이 음각으로 새겨진 희생자의 이름에 헌화하고 있다. '국립 9·11 메모리얼&박물관' 페이스북 화면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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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의견 속에서 ‘추모’와 ‘자존심’이라는 두 가지 합의의 열쇳말이 도출됐다. 추모는 50%의 부지를 추모공원에 할애하기로 한 결정으로, 자존심은 높이 541m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원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짓기로 한 결정으로 실현됐다. 또 주변과 조화롭고 24시간 활용 가능한 복합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성이 담긴 마스터플랜이 수립돼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는 데 한몫했다.
석경민 기자 suk.gyeongmin@joongang.co.kr,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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