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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英여왕도 쇠약한 몸 끌고 왔다…지리산으로 英왕실 홀린 韓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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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해 5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운데 착석)가 첼시 플라워 쇼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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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엘리자베스 2세가 쇠약해진 체력에도 불구, 지난해 5월 방문을 고집한 행사가 있으니, 첼시 플라워 쇼. 가드닝 전문 영국 왕립 협회(RHS)가 1862년부터 주최해온 정원 관련 박람회다. 엘리자베스 2세는 꽃분홍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환한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정원 관련 전시와 예술품을 둘러봤다. 꽃과 풀, 나무 등 자연에 관한 모든 것이 예술뿐 아니라 산업으로도 승화되는 곳이 첼시 플라워 쇼다. 찰스 국왕과 웨일스 공작부인, 즉 캐서린 왕세자비가 직접 작품을 출품하는 격조를 자랑한다. 흙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역시 참여한다. 귀족 전시라는 이미지가 강해도 일반인에게도 출전의 문호는 열려있지만 문턱은 높다. 그 문턱을 세 번이나 뛰어넘은 한국인이 있으니, 황지해 작가다. 2011년엔 한국 사찰의 해우소(解憂所), 2012년엔 비무장지대(DMZ)를 테마로 한 작품으로 출전을 넘어 금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팬데믹의 파고를 넘어가는 올해에도 출전권을 따냈다.

올해 그가 구상한 주제는 지리산 원시림. 한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자생 자연 품종을 예술작품으로 엮어냈다. 벌써 BBC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요청하는 등, 반응이 뜨겁다. 서울 모처 그의 작은 작업실로 찾아갔더니, 진한 허브향이 마중을 나왔다. 서울 사무실보단 지리산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작품 구상을 위해 산꾼과 함께 구석구석을 다니다 뱀을 만난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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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김 라일락. 이 특별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기사 후반에 이어진다.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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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해우소와 DMZ에 이어 지리산이 작품 주제인데요.

A : ”한국은 참 특별한 곳이에요. 영하 20도로 떨어졌다가 영상 30도로 올라갔다가, 바람도 비도 눈도 많이 오는 곳이 세계에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보고(寶庫)에요. 햇살이 따사로운 동쪽의 산청군에서 자라는 약성 식물이 무려 1500여종에 달해요. 변화무쌍한 날씨를 견디고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자라난 풀은 약성(藥性)이 강할 수밖에 없죠. 산이 곧 약국인 셈이에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편리함을 추구하려하지만 결국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거죠. 이번 전시에선 제 고향 광주 이야기와 제가 자라온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Q : 영국 반응이 궁금합니다.

A : “지리산에 ‘지리털이 풀’이라는 아이가 있어요. 오묘한 보라색을 가진 아이로 우리나라에서만 살죠. 하늘 아래 같은 보라색은 없답니다(웃음). 그런데 이 아이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기후변화 위기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어요. 한국에서 사라지면 이 세상에서 멸절하는 거잖아요. 영국인들은 특히 이런 점에 관심이 깊은 것 같아요. 영국인들이 정원 가꾸기에 대해 관심이 깊은 건 자연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죠. 폴 스미스도 첼시 쇼를 통해 친해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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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해 작가(맨 앞 모자 쓴 인물)와 폴 스미스 재단의 회의 현장. [황지해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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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 말인가요?

A : “네, 폴이 제 전시를 보고 연락을 해와서 친해졌어요. 폴 역시 영국의 멸종위기 식물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가 ‘정원을 만든다는 건 자연을 함축하는 일’이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폴이 디자인한 수트 안감에 꽃무늬가 들어가 있거나, 그가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연필을 깎은 뒤 남는 쓰레기로 흡착판을 만들어 재사용하는 것 모두가 자연과 인간의 다리를 놓아 선순환하는 거죠. 사실 폴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은 실제로 기업에 기후변화 위기 대응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ESG가 금융권 대출 조건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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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해 작가의 작업실엔 그의 드로잉과 타일 작업 등도 가득하다.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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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먹고 사는 게 급하면 정원은 사치라는 사람도 있을 텐데 아니군요.

A : “사실, 이제 비건부터 기후변화 위기 대응 등은 적어도 영국과 미국 등에선 생활뿐 아니라 기업 경영의 필수가 된 것 같아요. 실제로 부가가치 등 파급되는 경제 효과도 상당하고요. 종 보존도 하면서 그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자연도 지키고 경제 활동도 할 수 있는 거죠. 사실 저도 이런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들을 기다리는데 아직 쉽지는 않아서 아쉽네요. 그래도 그만둘 수 없죠. 타일 작업이나 공사처럼, 제가 자금 마련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일을 해서라도 이 일은 계속 해나가고 싶어요. 한국의 고유한 지리털이풀이나 모뎀이 풀 같은 아이들을 지켜내는 게 또다른 경제 효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게 지금의 세계적 트렌드라는 점을 꼭 전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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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고. 전남 구례에서 중앙일보 사진팀이 촬영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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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한국만의 그런 고유 품종 소개를 더 해주세요.

A : “미스김 라일락이라는 꽃이 있어요. 원래 우리 수수꽃다리 또는 정향나무를 미국에서 품종 개량해서 만든 식물이에요. 작은 화분에서도 잘 자라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죠. 우리가 이젠 그 아이를 역수입하는 실정이에요. 우리 고유의 품종이었는데, 아쉽죠. 튤립 같은 꽃도 원래 우리나라에도 있답니다. ‘산자고’라는 이름의 아이예요. 네덜란드 튤립과는 달리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게 특징이죠. 같은 튤립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 형태와 색감이 달라진다는 것도 자연의 섭리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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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지금까지 첼시 플라워쇼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요.

A : “2011년 전시가 끝나고 철거를 해야 하는데, 제 작품에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거에요. 그런데 첼시 플라워쇼 담당자가 ‘새가 스스로 날아가기 전까지는 철거할 수 없는 게 규정’이라고 하더군요. 하루하루 들어가는 비용이 있으니 속이 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영국의 저력이구나 했어요. (2012년) DMZ 전시 때는 7살 남자아이가 오더니 ‘안녕하세요, 나도 정원사인데, 구경을 해도 될까요?’라고 묻더군요. 아이의 엄마는 먼발치에서 지켜보고만 있고요. 아이가 직접 예의를 갖춰서 자연과 가까워지는 교육을 하는 거였죠. 여러모로 마음에 남은 에피소드에요. 우리도 그런 교육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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