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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숨] 안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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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과 2023년을 반으로 접어 책을 만들면 2022년 12월은 그 책의 중간 제본선쯤에 있을 것이다. 1922년에 어린이날 선언이 선포되었고 1923년에 전국적인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기에 올해와 내년에 걸쳐 어린이날 백주년을 기념한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축하 잔치가 넘쳐나야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슬픈 소식들을 마주한다. 무고하게 세상을 떠난 어린이들의 명복을 빌며 어린이와 관련된 올해의 글을 찾아 읽어본다.

경향신문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뒤에서 자리만 채우던/ 0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왔어// 잘 보이지 않던/ .이 0 옆으로 다가서자// 너도나도 힘내라고 달려 나왔어/ 0.518416029…”는 ‘어린이와 문학’ 181호에 실린 강기화의 동시 ‘소수의 힘’의 한 대목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다. 2022년 3분기 출산율은 0.79명이며 서울은 0.59명으로 가장 낮다. 그리고 어린이의 몸은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는 만취 운전자가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던 어린이가 가슴 아프게도 세상을 떠났다. 사고 현장 인근 건물의 외벽에는 친구를 잃은 또래 어린이가 또박또박 눌러쓴 ‘나쁜 범인’이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사고 이전에 통학로를 안전하게 정비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지역민 다수가 통행 효율성을 이유로 반대하자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경찰은 탄원서가 쌓이고 통곡이 쏟아진 뒤에야 뺑소니 혐의를 추가했고 구청은 뒤늦게 도로를 재정비하겠다고 한다.

동시 ‘소수의 힘’의 마지막 연을 보면 1도 안 되는 숫자들이 힘을 모아서 겨우 하나를 이룬다. 현실도 비슷하다. 1도 안 되는 어린이들이 힘을 모아서 간신히 자신들의 작은 몸 하나를 지키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어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음성이 상업적 욕망을 입고 변조되었을 때 어린이는 돈을 내야지만 대접받는 존재가 된다. 돈을 낸 어린이에게 권리를 달라는 주장이 위험한 이유다. 어린이의 권리는 구매자 평점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김유진은 ‘창비어린이’ 79호에 쓴 평론 ‘마이너의 마이너로서 쓴다는 일’에서 “어른이 말하는 ‘어린이 독자’라는 기표 뒤에는 교육이, 계몽이, 판매부수가, 돈이, 인기가, 힐링이, 대리 만족이, 또 그 밖의 많은 기의가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린이를 앞세우기만 하면 “진정성을 부여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툭하면 어린이를 내쫓는 사회에 살고 있어서인지 어디서 어린이를 불러주기만 해도 호의가 느껴지는 2022년이었다. 그러나 잘못 부르면 안 부르는 것만 못하다. 류재향의 동화 ‘우리에게 펭귄이란’에서 아홉 살 수민이는 슬렁슬렁 진실을 감추려는 어른들에게 “적당히 꾸며 내면요, 우리가 다 믿을 것 같아요?”라고 반문한다. ‘어린이’는 판촉스티커나 추억보정용 필터가 아니며 순진무구한 영혼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다.

줄어들고, 사라지고, 작은 점이 되고, 마침내 1도 안 되는 어린이가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 박규빈의 그림책 <왜 안 보여요?>는 “알고 있나요?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에 모두 신비한 안경을 선물받는다는 사실을”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어린이는 그 신비한 안경을 쓴 채 미끄럼틀을 타고 마트에 가며 하루를 산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작은 모래산은 에베레스트이기에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연체된 고지서를 착착 접으면 커다란 비행기가 될 거라고 믿기에 용감한 도전을 계속한다. 그들의 눈에는 나를 도와줄 고마운 친구, 내가 손잡아줘야 하는 위기의 친구가 보인다. 함부로 어느 역을 무정차 통과할 수도 없다. 친구의 고통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날 백주년의 기념 기간은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왜 안 보여요?”라는 질문과 소수의 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백주년은 기념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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