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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소방에 칼 겨눈 경찰 "우린 보조일뿐"…전문가는 의문 들었다 [안전 국가,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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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조사하는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가 1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을 향한 늑장 대응 등 의혹에 대한 내부 책임자 수사의 마무리 수순에 들어간 특수본의 칼끝은 이미 소방 당국을 향하고 있다. 특수본은 지난달 21일에 이어 26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한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을 소환해 대응 2단계 발령이 왜 지연됐는지, 최 서장의 판단이 적절했는지 등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최 서장이 현장 도착 후에도 30분 이상 주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소방 당국에 대한 경찰 수사는 기본적으로 재난안전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재난안전법상 소방은 긴급구조기관으로 경찰은 긴급구조지원기관으로 분류돼 있다. 소방엔 재난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우려가 있을 때 예방 및 인명 구조, 응급처치 등을 해야 할 책임이 부여돼 있다 한다.

경찰은 참사 당일 112 인파 신고 쇄도로 두 차례 소방에 공동 대응을 요청했지만 환자가 없다는 등 이유로 종결됐고, 또 당일 오후 10시까지 소방대원들이 사고 현장 인근인 해밀톤 호텔 앞에서 당직 근무를 하게 돼 있었지만 부실하게 운영돼 사고 인지가 늦어졌다고 의심하고 있다.



책임론에 재난안전법 꺼내든 경찰



현행법상 경찰은 현장 통제, 교통 관리 등 소방 당국의 구조에 보조적 역할만 하도록 돼 있다는 게 경찰의 법인식이다. 한 경찰 간부는 “소방에 책임을 묻는 게 불가능하면 경찰에는 어떻게 책임을 묻냐. (소방이) 당연히 안전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안 했다”고 말했다. 특수본 수사를 상세히 알고 있는 다른 경찰 관계자 역시 “사고 전부터 신고와 경찰 공동대응 요청도 들어왔다. 요청이 들어오기 전이라도 근무자가 배치돼 있었다면 소방이 출동해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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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경찰 과학수사대원 등이 인명사고가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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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각에선 재난 시 경찰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빠른 현장 대응이 가능하고, 특히 특정 유형의 참사에선 경찰의 역할이 중요한데도 재난 시 역할이 소극적으로 규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재난 상황에서 제일 먼저 현장에 나가는 건 경찰이다. 24시간 순찰을 돌기 때문”이라며 “경찰의 본질적 관할 사무는 수사가 아닌 위험 방지다. 재난 상황일지라도 예를 들어 테러를 통한 연쇄 폭발,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 자살, 대규모 압사 사건 등에선 경찰의 우선적 개입이나 경찰·소방의 동시적 개입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경찰은 구조 지원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당초 자치경찰제 시행 이후 재난 시 지자체와 자치경찰이 손발을 맞춰 구조 지원 업무를 수행하게 돼 있지만, 자치경찰 보고 체계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난 대응 체계 가동을 늦추는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경찰 안팎에선 나온다.

현행법상 구조지원 업무는 자치경찰 사무로 지자체 산하 시·도 자치경찰위원회가 지휘·감독권을 가지게 돼 있다. 그러나 모든 경찰 기능이 실질적으로 일선 경찰서장이 지휘·통제를 받는다. 이태원 참사에서 서울시 자치경찰위는 사고 발생 75분 후에야 경찰이 아닌 서울시로부터 사고 발생 사실을 통보받았다. 경찰 보고 체계에서 자치경찰위가 제외되면서 자연스레 지자체의 대응도 그만큼 늦어졌다.



경찰 내놓은 대혁신 과제에도 전문가들 ‘시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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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당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의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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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한 달이 지났지만 경찰 내부 개혁을 위한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경찰이 참사 후 꾸린 ‘대혁신 태스크포스(TF)’는 지난 18일 인파 사고 예방 매뉴얼을 제작하고, 112상황실 보고체계를 개편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9대 과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이태원 참사는) 인파 관리 등에서 경찰의 역량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경찰의 기본 패러다임이 일반 시민들의 안전보다는 정치권에 쏠려 있었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대혁신’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 경찰 간부는 “(용산서장이었던) 이 총경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누구라도 대통령실 인근 경비에 더 신경을 쏟았을 수밖에 없다”며 “정권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경찰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중요한 건 기본을 지키는 것”이라며 “기존에 있던 매뉴얼도 안 지키는데 자꾸 새로운 매뉴얼을 만든다고 달라질 게 없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재난 시 경찰의 역할을 격상하고, 다른 기관과 협조가 용이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용 교수는 “경찰·소방과 지자체 중 재난 안전 관련 예방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데는 (경찰) 정보과”라며 “정보과 정보관은 관할의 모든 위험 상황과 안전상황 정보를 다 가지고 분석한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정보 보고서가 구청 등으로 전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웅혁 교수는 “얼마큼 체계적으로 현장에서 재난 대응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평상시 응급 의료 체계 등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어야 하고, 밀집 취약 지역을 예측해 지자체가 사전 행정 지도를 하는 등 기관들이 한 팀으로 재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병준·나운채·최서인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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