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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사망자? 희생자? 논란된 ‘단어 선택’ 문제… 해외 유명 언론들도 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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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참사로 숨진 156명을 어떤 단어로 부르냐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광주광역시는 합동분향소 명칭을 ‘참사 희생자’로 바꿨다. 야당은 정부가 ‘희생자’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해외 언론들은 ‘희생자’와 ‘사망자’를 혼용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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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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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출신 송두환 인권위원장 “희생자냐 사망자냐, 선택의 문제”

더불어민주당 측은 이태원 압사 참사로 숨진 사람들을 ‘희생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광주광역시는 전날(2일) 시청 1층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변경했다.

민주당 소속 강기정 광주시장은 페이스북 글에서 “참사 초기 추모 분위기에 역행하는 논란이 일까 싶어 행정안전부 지침에 따랐지만 경찰 초기 대응 실패 등이 원인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만큼 이제라도 희생된 분들을 제대로 추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행안부는 지침을 다시 내려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경기는 전날, 전남·전북·제주는 3일 합동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교체했다. 김동연 경기지사, 김영록 전남지사, 김관영 전북지사, 오영훈 제주지사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 진보 성향인 조희연 교육감이 이끄는 서울시교육청도 명칭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변경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전날 국회 운영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를 대상으로 연 국정감사에서 송두환 인권위원장에게 인권위 차원에서 정부에 ‘사고’가 아닌 ‘참사’라고 표기하도록 권고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송 위원장은 “참사냐 사고냐, 희생자냐 사망자냐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저희가 더 논의해야겠지만, 이 부분은 현재 단계에서는 선택의 문제라 생각한다”면서 “어느 용어를 금기시하는 건 불가하니, 자연스럽게 이 용어는 한쪽으로 통일돼 가지 않을까”라고 했다. 송 위원장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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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가 2일 오전 시청 시민홀 입구에 마련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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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난 관련 용어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는 것”

사망자와 희생자를 놓고 논란이 이는 배경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희생자를 ‘희생을 당한 사람’ ‘사고나 자연재해 따위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 등 두 가지 뜻이라고 설명돼 있다. 희생의 뜻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천지신명 따위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과 함께 ‘사고나 자연 재해 따위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음’이라고 풀이돼 있다.

사고나 자연재해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은 경우를 희생이라고 뜻풀이한 것은 2014년부터다.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 표현이 널리 쓰이자 논의를 거쳐 뜻풀이를 추가한 것이다. 한 네티즌은 세월호 참사 일주일 뒤인 2014년 4월 23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피해자를 희생자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냐’고 질문했고, 국립국어원은 “의문이 들 수 있어 검토하고 심의회에 올리겠다”고 답했다. 그 뒤 2014년 2분기 심의회에서 ‘희생’과 ‘희생자’의 현재 뜻풀이가 통과했다.

다른 나라도 ‘희생자’의 의미 중 하나로 이 같은 풀이를 내놓고 있다. 영국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희생자(victim)의 첫 번째 의미로 ‘범죄, 질병, 사고 등의 결과로 부상 또는 사망한 사람’이라고 풀이해놓고 있다. 권위 있는 일어 사전인 고지엔(廣辞苑)은 희생(犠牲)의 의미 중 하나가 ‘뜻밖의 재난을 만나 죽거나 상처를 입는 것’이라고 설명해놓고 있다. 희생자의 뜻은 ‘어떤 일 때문에 희생을 당한 사람. 특히 사고에 의한 사망자’라고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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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나온 '희생자(victim)' 뜻풀이. /옥스포드 영어사전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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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영미권과 일본 언론은 이태원 참사로 숨진 사람들에 대해 ‘사망자’와 ‘희생자’를 혼용해서 쓰고 있다. 영국 BBC는 지난 1일(현지 시각) ‘한국의 핼러윈 충돌(crush) : 희생자들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희생자(victim) 대부분은 20대였고, 사망자(dead) 중에는 여성이 남자보다 많았다. 관리(official)들은 사망자 중 26명의 외국인이 있다고 말한다”고 보도했다.

일본 NHK는 지난달 31일 ‘서울 이태원 전도 사고, 일본인 2명 포함 154명 사망 133명 부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정부 관계자에 의하면 사망자(死者)에 일본인 2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같은 기사에서 “2001년 효고현 아카시시의 보도교에서 불꽃놀이 축제 관람객이 겹쳐 쓰러져 많은 희생자(犧牲者)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정부는 이번 참사에 ‘사망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입장이다. 박종현 행안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은 “정부가 (희생자라는 표현을 안 쓰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며 “재난 관련해 용어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는 일종의 내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른 기관에서) 희생자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가? 된다.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했다.

세종=손덕호 기자(hueyduc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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