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너머: beyond news]
〈글 싣는 순서〉
1. 갈 길 바쁜 재건축·재개발 사업, 비리가 발목 잡았다
2. 비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허위 사업비와 만능 키 OS
3. 반성 없는 사업, 조합원이 똑똑해야 부패가 사라진다
지난 2018년 초 서울 송파구의 한 재건축 조합은 J 철거업체와 석면 해체 용역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액은 약 60억원. 앞서 이 조합은 철거할 건물에 석면이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하는 용역에도 약 13억원을 썼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법 위반이다.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에 따르면 재건축·재개발 조합은 시공사와 도급 계약을 맺을 때 철거를 포함해야 한다. 석면 철거 공사 역시 시공사가 해야 한다.
이는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한 2009년 ‘용산 참사’ 이후 조합과 철거업체의 ‘불필요한’ 접촉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석면 해체뿐 아니라 석면 조사 역시 철거 공사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공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2009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요원들이 서울 용산 재개발 농성자 사망 사건 현장에서 감식을 위해 불에 탄 망루를 뜯어 내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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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조합을 포함한 전국 재개발‧재건축 조합 대부분이 버젓이 철거업체와 석면 조사‧해체‧감리 계약을 맺고 있다. 지난해 6월 철거 건물 붕괴로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 조합장 역시 6억원짜리 석면 철거 공사비를 22억원으로 부풀려 특정 철거업체와 계약한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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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돈, 부풀려진 공사비…"현금 거래, 적발 어려워"
이 과정에서 공사비가 부풀려지고, 조합과 업체 사이에 뒷돈이 오가기도 한다. 서울의 한 재건축 조합은 8000만원이면 되는 석면 해체 공사를 10억원에 계약하면서 해당 업체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는 의혹을 받는다. 심지어 석면 철거와 감리 업체가 사실상 한 법인인 경우도 있다.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이 잘 해체됐는지를 같은 업체가 감시하는 꼴이다. 비슷한 면적인데도 석면 조사·철거 비용이 수 배 차이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익명을 원한 한 철거업체 대표는 “계약을 맺으면서 계약 금액의 5~10% 정도가 리베이트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며 “현금이 오가기 때문에 적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털어놨다.
밀실 수의계약은 물론 불필요한 계약에 조합 돈이 줄줄 새는 곳이 부지기수다. 조합원 동의(의결) 없이 용역 계약을 맺고, 조합원 총회 의결을 거치더라도 조합원들이 알지 못하게 계약 금액을 부풀리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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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물 철거도 부풀리기…처벌은 드물어
지장물 철거 계약도 그중 하나다. 새 아파트를 지으려면 기존 노후주택을 철거해야 한다. 이때 철거는 시공사가 맡도록 법으로 규정돼 있다. 이중 전기시설이나 통신‧가스‧수도 같은 지장물은 관리권자인 한국전력, 통신사, 가스‧수도사업소가 철거하고 조합에 비용을 청구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조합이 이를 무시하고 철거업체와 지장물 철거 계약을 맺는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조합은 아예 수도‧전기‧가스관 철거를 분리해 3곳의 업체와 각각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 지역 조합원은 “지장물 철거를 3곳에 분리 발주하고 용역비도 과도하게 계약했다”며 “조합 측에 항의했지만, 다른 조합도 다 마찬가지라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재개발 조합처럼 사업시행인가(건축 허가)도 나기 전에 철거업체와 지장물 철거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선지급한 사례도 적지 않다.
허술한 계약 내용은 비리를 더욱 부추긴다. 서울의 한 재개발 조합은 2018년 16억원에 모 철거업체와 지장물 철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구역 면적만 표시돼 있고, 구체적인 공사 기간이나 인력 투입 등의 내용이 전혀 없다. 이 조합 관계자는 “조합원들이 계약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찬성 결의서를 내준 게 문제”라고 말했다.
2021년 광주 동구 학동의 한 철거 작업 중이던 건물이 붕괴, 도로 위로 건물 잔해가 쏟아져 시내버스 등이 매몰됐다. 사진은 사고 현장에서 119 구조대원들이 구조 작업을 펼치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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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어져도 처벌되는 사례도 드물다. 지난해 6월 철거 건물 붕괴사고로 17명의 무고한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 조합과 인근 지역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광주지역 시민단체 등은 이 지역 13개 재개발 조합을 고발했다. 조합들이 전기‧통신‧가스‧상하수도 등 지장물 철거를 시공사가 아닌 다른 용역업체와 이중 계약하거나 계약 금액을 부풀려 조합원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다.
실제로 2016~2019년 광주 지역 13개 재개발 조합은 철거업체와 300억원가량의 지장물 철거 계약을 각각 맺었다. 대부분 상수도와 가스‧전기시설, 가로등 철거 용역이었다. 철거 면적과 가구 수가 비슷한데 계약금액이 2배 이상 차이 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 시민단체가 고발한 사건 대부분은 ‘혐의 없음’이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송치하거나 수사 종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토부에서도 시공사가 아닌 다른 업체와 철거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유권해석이 있는데도 조합 의결을 거친 계약서대로 계약이 이행됐다는 이유로 경찰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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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예방 용역'부터 '법률자문'까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
범죄예방 용역 계약도 조합비가 부풀려지는 대표적 사례다. 2010년 2월 부산 사상구 덕포동 재개발 지구에서 여중생을 납치·성폭행 후 살해한 김길태 사건 이후, 모든 재개발 지역은 법에 따라 범죄예방 대책을 세우고, 폐쇄회로 TV와 가로등 등을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 법을 악용해 용역비를 부풀리는 조합이 적지 않다. 현행법상 순찰은 경찰만 할 수 있는데, 많은 조합이 ‘순찰 업무’를 계약서에 넣고 거액의 용역비를 지급하고 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재개발 조합 관계자는 “조합 측에서 범죄 예방과 이주 관리 명목으로 4년 전 한 철거업체와 70억원에 계약을 한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며 “조합 측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다”고 토로했다.
법률 자문이라는 명분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계약도 이뤄진다. 부산의 한 재개발 조합은 법무법인도 아닌 개인 변호사에게 법률 자문과 소송 업무 등을 맡기는 대가로 45억원을 지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 지역 조합원은 “소송 건별로 수임 계약을 하는 게 대부분인데, 로펌도 아닌 개인 변호사와 이런 과도한 계약을 맺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전주시 완산구 전주힐스테이트 전경 모습. 조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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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잡음 없이 준공‧입주를 마친 후에 조합의 문제가 드러나는 곳도 적지 않다. 올해 6월 말 입주를 시작한 전주시 완산구 전주힐스테이트어울림효자 아파트 조합원들은 입주 직전 조합 측으로부터 45억원의 추가 분담금을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비대위를 구성해 조합 측에 항의하자 조합 측은 애초 통보한 추가 분담금의 40%만 내면 된다고 알려왔다. 익명을 원한 재개발 전문가는 “분담금이 이렇게 고무줄처럼 늘고 주는 것은 정상적인 조합에선 있을 수 없는 일”라며 “조합원들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합 비대위 관계자는 “전문업체에 감정 의뢰한 결과 조합 측이 토목, 조경 공사 등을 수의 계약하면서 시중 금액보다 10억원가량 초과 지출한 것이 밝혀졌고, 조합 임대아파트 34세대를 직원이 2명뿐인 무자격 업체에 헐값에 매각한 정황도 있다”며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조합 측은 본지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 밖에 이주관리 용역, 수방·제설 대책 용역, 국공유지 무상 양도 용역 계약 등에서 허위 혹은 부풀리기 사업비 사례도 적지 않다. 또 총회 홍보(OS) 용역이나 정비기반시설 공사 계약 때 산정 근거도 없이 과도한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정비사업 전문가인 김상윤 법무사(저스티스파트너스 대표)는 “조합원이 눈뜨고도 모르는 돈들이 각종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줄줄 샌다”며 “이는 결국 조합원들의 재산상 손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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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고성표·김태윤·양수민 기자 beyond_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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