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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재판없이 형무소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증언… 4·3사건 다룬 ‘돌들이 말할 때까지’의 김경만 감독[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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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에서 제주 4.3 생존자인 양농옥씨(91)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끌려가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증언한다. DMZ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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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상에 대해서나, 정치에 대해서나 머리를 둔 사람이다 (싶으면) 보면 다 죽였어요. 젊은이도, 늙은이도.”

제주에 사는 양농옥씨(91)는 제주 4·3 사건 당시 눈앞에서 총살당하는 아버지 모습을 봤다. 1948년 11월 제주시 도두동에서 경찰 한 명이 죽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경찰은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유지들을 다 잡아가 공개총살했다. 양씨 아버지는 누군가의 지목을 받고 지프차에 태워져 끌려갔다. 아버지를 5일 동안 찾아다니다 결국 황망히 보낸 경험을 양씨는 차분하게 풀어놓는다. 사건 발생 70여년이 흘러 양씨에게 4·3 사건으로 인한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 물으니 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생존자가 말하는 4·3 사건의 진실이다.

지난달 29일 끝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최초 상영된 <돌들이 말할 때까지>에는 양씨를 포함해 할머니 5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당시 스무살 내외의 젊은이로, 4·3 사건을 직접 경험했다. 양씨를 제외한 할머니 4명은 재판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타지의 형무소로 끌려가 수감생활까지 했다.

영화를 만든 김경만 감독은 2016년부터 약 6년간 제주에 50번 넘게 찾아 할머니들의 구술 증언을 카메라에 담았다. 4·3 관련 수형인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이처럼 길게 담아 영화화한 것은 김 감독의 작품이 처음이다. 올해 DMZ영화제에서 사회 참여·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에 주어지는 ‘용감한 기러기상’을 받았다.

지난달 26일 전화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4·3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남한의 시작과 같은 사건”이라며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오래전부터 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고도 없는 외지 사람이 가서 물어본다고 한들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고서 김 감독은 4·3 관련 강연장과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촬영거리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4·3도민연대에서 진행하는 수형인 구술조사 연구에 2016년부터 함께하면서 수형인과 이들의 유족 중 120여명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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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말할 때까지’의 김경만 감독. 감독 제공.


영화는 끔찍한 그날들의 풍경을 서술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끌려나와 갑자기 낯선 감옥으로 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다. 박순석씨(95)는 당시 마을 주민들과 허겁지겁 인근 거문오름에 올라갔다. 몇개월 후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주정공장이나 부두에 선 채로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형기를 통보받았다. 박씨는 3년형을 구형받고 배에 올라타 “그냥 죽으러 가는 걸로만 알고” 전주형무소까지 갔다. 형무소 도착 다음날 주먹밥을 배식하러 온 사람이 여기는 형무소라고 알려준 순간 “이젠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어 방에 있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김 감독은 “수형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집을 불태우고, 가족을 잡아죽이는 것 같은 큰일의 반복이었다”며 “수형인 120명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루고 싶었는데,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있어서 수형인 할머니 네 분과 양농옥씨 위주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4·3 사건은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에 걸쳐 일어났다.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육지로 끌려간 수형인만 2530명이다. 이들은 15곳 형무소로 분산 수감됐다. 김 감독은 “4·3 사건 수형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수감된 형무소가 어디인지, 시기가 언제인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며 “한국전쟁 시기에 인천형무소를 경험하신 할아버지들 이야기를 추려서 다음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데뷔작부터 한국 현대사의 순간들을 다뤄왔다. 감독 데뷔작인 <각하의 만수무강>(2002)은 한국정부가 제작한 대한뉴스에서 마치 신이나 제왕처럼 다뤄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을 엮어서 블랙코미디처럼 연출한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가 한국의 민가를 폭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미국의 바람과 불>(2011)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영상 기록물을 통해 되짚으며, 미국을 향한 한국의 기이한 애정을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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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당시 20세였던 박순석씨(95)는 간첩으로 몰려 산으로 피신했다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DMZ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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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제 세계보다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그러다보니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제가 현대사에서 특히 관심이 있는 시기는 한국전쟁이 있던 194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이 출발한 시기거든요. 남한이 절대 선이고, 북한은 절대 악이라는 거짓말 같은 인식이 이때 형성되죠. 우리가 이런 거짓말 같은, 진영주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속 생존할 수 있을까? 묻고 답하려면 역사를 다시 봐야 하죠.”

그는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만들고 4·3 사건에 대해 알아가면서 “제주도에서 지금쯤 자라서 울창한 숲이 됐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베어버렸다”며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왔다면 더 포용력있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제야 조금씩 (이야기의)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했다”며 “아직도 4·3 사건과 관련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으니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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