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대표적 성매매 집결지였던 전주시 서노송동 선미촌 거리. 지난해 12월 기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성매매 업소 3곳이 문을 닫았다. 김준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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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예술제’ 작가 3명 배제…“사상 검열” 논란
전북 전주시 산하 기관이 주최한 예술 행사가 ‘예술가 사상 검열’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기관이 행사에 참여하기로 한 작가 일부의 ‘성산업 종사자’, ‘성노동자’ 발언을 문제 삼아 계약을 해지하면서다. 예술가 동료와 단체들은 “‘평등’과 ‘페미니즘’ 기치를 내걸면서도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논의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정치적 입장만을 강요하는 건 명백한 차별”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2일 전주시 등에 따르면 사단법인 오픈넷 등 예술 관련 8개 단체는 지난달 28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전주시 사회혁신센터 성평등전주(이하 성평등전주)를 규탄하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이들 단체는 “성평등전주가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지구탈출’의 참여 작가로 선정된 10인 중 3인을 이들의 사상과 양심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전시에서 배제했다”고 주장하며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다.
지난 7월 16일과 18일 예술제 준비를 위한 비공개 워크숍에서 해당 작가들이 특정 개념을 사용하고 주최 측과 다른 정치적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전시에서 배제됐다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앞서 전주시와 성평등전주는 지난달 19~26일 전북의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였던 서노송예술촌(선미촌)에서 예술제를 열었다.
성평등전주 규탄 성명문 일부. 사진 제3회 페미니즘예술제 지구탈출 공론화 페이스북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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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단체 8곳 “명백한 차별” 연대 성명
2000년대 초반 성매매업소 85곳이 불야성을 이루던 선미촌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업소 3곳은 지난해 말 모두 문을 닫았다. 전주시는 2014년부터 선미촌 일대(2만2760㎡)를 문화·예술인이 창작 활동을 하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으로 바꾸는 문화재생 사업인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연대 서명에 나선 이들 단체는 국비·시비가 들어간 예술제에서 주최 측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모에 선정된 작가들을 강제로 하차시킨 것은 “헙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헌법재판소는 2020년 12월 23일 박근혜 정부 시절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문화·예술인을 구별하는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재정 지원 등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은 평등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고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근거로 댔다.
이어 “‘예술인 블랙리스트’ 재발을 막기 위해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2021년 제정돼 올해 9월 25일 시행됐다”고 덧붙였다. 해당 법률은 ‘국가기관 등 예술 지원 기관은 합리적 이유 없이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특정 예술인을 배제하거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예술인의 예술 활동에 부당하게 개입·간섭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미촌 내 성매매 업소 유리문에 '철거'라고 적혀 있다. 김준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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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 여성 ‘성노동자’ 부르는 것 반대” “왜 안 되나” 갈등
작가 A씨는 “1차 워크숍에서 스스로 ‘성산업 종사자’라고 밝혔다는 이유로 (주최 측 관계자에게) 혼자 불려나가 사상에 관한 질의에 답변해야 했다”며 “성평등전주가 규정하는 ‘반성매매’라는 정치적 입장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내몰리며 전시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했다.
작가 B씨는 “2차 워크숍에서 성평등전주 C소장의 ‘성매매업소 여성이 성노동자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발언에 대해 ‘반성매매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다양한 맥락과 논의 지점이 있기에 노동자로 개념화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며 “그 자리에서 C소장에게 ‘같이 전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작가 D씨는 “성노동자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가 “성평등전주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절충안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 단체는 “성평등전주가 문제 삼은 성노동 개념은 소위 반성매매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와 개인도 사용하고 있다”며 “성매매가 구조적인 이유로 자원이 부족한 여성들의 생계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내거나 성매매 여성에게 권리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주장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예술제의 기획 의도는 혐오와 차별 없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성평등전주는 ‘반성매매 가치’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도리어 보편적인 인권 규범과 평등 원칙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전주시 사회혁신센터 '성평등전주'에서 전시 중인 '한눈에 보는 선미촌'. 김준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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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단체 “신뢰 잃게 만든 점 사과”
작가들이 항의하자 성평등전주는 지난 7월 22일 홈페이지에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작가 모집 공고에 전시 장소와 관련해 반성매매 가치를 기반으로 성매매 집결지를 폐쇄한 장소인 점을 명시하지 않아 혼란을 야기했다”는 글을 게시했다. 예술제를 주관한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도 1일 사과문을 내고 “전시 취소 통보 이후 해결책을 묻는 작가들에게 빠르게 응답하지 않고 신뢰를 잃게 만든 점, 감정을 호소하며 적절한 대안 없이 비공식적인 사과만을 반복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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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전주 “블랙리스트 주장은 왜곡”
이번 논란에 대해 성평등전주 측은 “반성매매 운동 진영과 성노동 운동 진영이 충돌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면서도 “블랙리스트 주장은 왜곡”이라고 했다. 성평등전주 C소장은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페미니즘 예술제라고 해서 모든 사상을 포함하는 건 아니다”며 “(전시가 열린) 선미촌은 성매매 근절을 위해 20년 가까이 운동을 해온 곳인데, 일부 작가가 ‘성 구매자들이 안 오면 언니들은 어떡하냐’고 질문하는 등 우리 입장과 다른 부분 때문에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블랙리스트를 만들 만한 권력을 가진 기관도 아니고, 작가들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지도 않았다”며 “다만 작가들에게 선미촌의 역사적 맥락과 반성매매 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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