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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길걷다 끌려간 선감학원, 1년 뒤 '지옥'서 만난 형·동생…'삼형제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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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안영화씨 "폭행·강제 노역, 그곳은 지옥, 죽은 친구 직접 묻었다"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는 하루, 너무 배고파 나무 뿌리 먹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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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안영화씨(70)가 인천 광역시 한 카페에서 지난 28일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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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원태성 유민주 기자 = "멀리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과 동생을 바라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선감학원 피해자 안영화씨(70)는 당시 동인천 변두리에 살았고 도심에서 친구와 놀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서 집으로 가던 길에 끌려갔다. 그의 나이 불과 13살 때였다. 지옥이었던 그곳에서 1년을 보냈을 즈음 형과 동생이 눈앞에 나타났다. 꿈에 그리던 이들이었지만 그들을 이곳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삼형제의 비극은 시작됐다.

지난 28일 만난 안씨는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두살 위 형과 네 살 아래 동생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아들의 행방을 찾던 아버지는 술로 연명하다 안씨가 선감학원에 수감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혼자 남겨진 네살배기 막내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안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영문도 모른채 끌려왔던 3년간의 시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쳤다"며 "우리 삼형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선감학원의 피해자였고 우리는 남은 기간을 그곳의 트라우마속에 살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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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선감학원 아동들(국가기록원 제공)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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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 교화 목적' 선감학원…"아버지도, 집도 있었지만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일제강점기인 1942년 설립된 아동집단수용시설 선감학원은 부랑아를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경기도 주관으로 1982년까지 운영됐다. 그러나 이곳의 실상은 마구잡이로 아이들을 연행해 강제노동을 시키던 인권침해의 온상이었다.

안씨는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왔던 1965년 그날의 날씨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는 "몇월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안개비가 내리던 날이었다"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안씨는 당시 동인천 변두리에 살았는데 도심에서 친구들과 놀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정장입은 남자 두명이 안씨를 끌고 강당으로 데려갔다.

안씨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 '아버지가 집에서 기다리신다'고 아무리 소리쳤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영문도 모른채 강당에 갇힌 안씨는 10여일을 자신과 비슷한 또래와 그곳에서 지내다 트럭과 배를 타고 선감학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안씨의 지옥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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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안영화씨(70)가 1965년부터 3년간 갇혀있던 선감학원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적은 글.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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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서 구타·노역 자행, 그곳은 지옥이었다"

선감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안씨는 삭발을 당하고 죄수복 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안씨의 기억으로는 선감도에는 여러 개의 기숙사동이 있었고 한 동에 10~20명의 아이들이 반을 이뤘다.

'교화'가 목적이라는 이 곳에서 학교 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씨는 "정부에서 홍보한 교육은 커녕 그 안에서는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안씨가 말한 그곳의 일과는 일로 시작해 일로 마무리 됐다. 10대 아이들은 성인들도 버거울법한 뽕밭이나 논에서 하루종일 일을 했다. 그렇다고 밥을 제대로 준 것도 아니었다.

안씨는 "그 곳에 있는 내내 항상 배고팠다"며 "하루종일 노역에 시달려도 식사는 밥 한공기에 새우젓 하나, 짠지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배고픔을 못이기고 산에서 나무 뿌리를 먹기도 했다.

배고픔과 힘든 노역이 끝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는 선생님의 묵인 하에 폭력이 자행됐다. 안씨는 "반별로 힘이 센 아이들이 반장으로 불리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아이가 있을 경우 단체 기합을 주거나 때렸다"며 "그곳에는 인권이란 것이 없었고 말그대로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지옥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한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안씨 역시 바다를 바라보며 여러 차례 탈출을 고민했다. 하지만 안씨는 결국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씨는 파도에 휩쓸려 온 친구의 시신을 스스로 묻은 사연을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묻은 건 한명이지만 이 곳에 있는 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며 "폭력에 시달려 죽은 친구들, 영양실조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들 모두 눈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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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유해 매장지에서 조사단원들이 시굴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2.9.26/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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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 지옥서 벗어났지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안씨는 3년만에 지옥에서 벗어났지만 그가 갈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씨는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선감학원에 끌려 온 형과 동생과 재회한 뒤에도 2년을 더 지옥에서 보낸 뒤에야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그가 갈 곳은 사회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그에게는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안씨는 "선감학원을 나온 뒤 부랑아라는 꼬리표,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으로 모든 것을 숨긴채 살아왔다"고 이후의 어려웠던 삶도 담담히 말했다.

고통스러웠던 수감생활을 덤덤히 얘기하던 안씨의 목소리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은 죄책감과 그리움이 섞인 눈물이 차올랐다.

안씨는 "갑자기 사라진 아들 걱정에 매일 술로 연명하시다 내가 끌려간지 1년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며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무릎 꿇고 빌거다. 나는 불효자다"고 자책했다.

13살 어린 나이에 선감학원에 끌려가 3년간 폭력, 강제 노동 등 온갖 인권침해를 당한 안씨는 엄연히 피해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감학원에 끌려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그곳에서 당한 고통으로 생긴 트라우마로 평생을 괴로워했다.

안씨는 "선감학원에 갇힌 3년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며 "아직 가족조차도 모르는 사건이지만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보상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부랑아라는 꼬리표로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굳은 의지로 생계를 이어갔고 22살에 아내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평생을 온갖 멸시를 겪어왔던 안씨는 가족들에게조차 아직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안씨는 가족도 모르는 자신의 당시 아픔을 증언하게 된 것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동료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운이 좋아 가족도 꾸리고 했지만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로 어렵게 살아가는 형제들이 많이 있다"며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조금이라도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결심을 다졌다.

kha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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