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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바이든이’ 인가? ‘바이든에’ 아니고? [노원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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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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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이른바 ‘비속어’ 발언 논란과 관련해 몇 가지 ‘음성론적’ 견해가 충돌하고 있다.

이 발언을 녹취한 방송사는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자막을 달았다. 이때 국회는 미국 의회를 말하는 것이고 XX들은 미국 하원의원들(아마도 야당인 공화당 의원들)로 해석됐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기구인 글로벌펀드에 미국 정부가 6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미국 의회가 지원안을 승인 해주지 않으면 망신스럽지 않겠냐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후 이 영상과 녹취를 추종 보도한 상당수 언론은 ‘바이든은’의 주격 조사를 ‘바이든이’로 바꿔서 보도하고 있다. 아마도 직접 들었을 때 ‘바이든은’보다는 ‘바이든이’로 들리는 사람이 많은 탓이라고 생각된다. 즉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 버전이다.

반면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윤 대통령 발언 중 ‘바이든’이라고 보도한 것은 ‘날리면’이었다”고 해명했다. 또 국회는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를 말한다고 주장했다. 김 수석에 따르면 (바이든이 미국 정부 60억 달러 지원을 약속할 때) 윤 대통령이 저개발 국가 질병 퇴출을 위한 1억달러 공여를 약속했는데 이걸 거대 야당이 통과시켜주지 않아 날리게 되면 국제사회에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대통령실에서 주장하는 버전은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이다. ‘승인 안 해주면’이 ‘승인 안 해주고’로,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바뀌었다.

한편 ‘친윤계’로 분류되는 집권 여당의 일부 의원들은 비속어 논란의 핵심인 ‘이 XX’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국회에서 이 XX들이’가 아니라 ‘국회의원 이 사람들이’였다는 것이다. 그 뒤의 말은 초선들마다 약간씩 달라서 소개하지 않겠다. 자기가 듣고 싶은대로 막 가져다 붙이고 있다.

나는 음성 전문가가 아니므로 음성론에 기반한 논란에는 숟가락을 얹을 자격이 없다. 다만 24년째 남의 말을 들어서 받아적고 해석하고 글로 옮기는 일만 해온 입장에서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 쪽이다.

결론부터 말해 내가 생각하는 버전은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에 쪽 팔려서 어떡하나”가 되겠다. ‘바이든은’ 혹은 ‘바이든이’에서 주격조사 은과 이가 방향을 의미하는 격조사 ‘에게’의 줄임말 격인 ‘에’로 바뀌었다.

솔직히 내 귀에는 대통령이 ‘바이든이’라고 말했는지 ‘바이든에’라고 말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실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들리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 귀는 썩 믿을 게 못 된다.

대신 문장 맥락을 볼 때 ‘바이든이’보다는 ‘바이든에’가 합리적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회에서’. 일반인 중에는 다른 나라 의회도 ‘국회’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국회는 대한민국 의회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미국 의회를 국회라고 부른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정치를 상시로 접하고 거론해야 하는 사람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기자들 같은 직업군은 웬만해선 미국 의회를 ‘의회’로 부르지 ‘국회’로 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통령은 한국인 중 미국 의회에 관련된 보고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일 것이다. 대통령에게 미국 관련 보고를 자주 할 박진 외교장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에게(문제의 발언 당시 대통령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국회’로 칭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되 부자연스럽다. 이때 국회는 대한민국 국회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이 XX들이’. 나는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구사하는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그가 검찰총장일 때나 지금이나 점잖고 교양있는 언어만 사용하리라 생각한 적도, 기대한 적도 없다. 특수부 검사와 사회부 기자는 공통점이 있는데 제3자를 호칭할 때 존칭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을 놓고도 ‘000이 어때?’ ‘예 그 정도면 괜찮은 인간이죠’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하다. 그것은 권장할만한 문화는 아니지만 ‘상대의 크기에 위축되지 말고 네 할 일을 똑바로 하라’는 나름의 조직 철학에 기반한 습관이다. 욕이 그렇게 어색한 직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미국 의원들을 향해 ‘이 XX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검사와 기자들의 ‘적대감’은 상대가 ‘잠재적 적’인 경우에만 발휘된다. 그래도 배운 사람들인데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을 놓고 ‘이 XX, 저 XX’ 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와 척질 일이 있었나.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린 상대는 누구인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가. 나는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야당을 그런 식으로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조금도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조언한다. 그런 ‘검사적’ 언어 습관에서 빨리 벗어나기 바란다. 대통령은 검찰총장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국민통합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셋째, ‘쪽 팔려서 어떡하나’.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가 60억달러 지원안을 승인해주지 않아 바이든 체면이 깎이는 상황을 가정하고 발언했다는 그 설명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농담치고는 너무 뜬금없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지원안에 대한 미국 의회 기류에 대해 사전 정보가 공유된 사람들끼리 통할 수 있는 농담이다. 박진 외교 장관과 김성환 국가안보실장이 대통령에게 ‘미국 의회가 통과시켜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고 사전 보고라도 한 것인가. 그렇다 한들 윤 대통령 입장에서 바이든 체면이 깎이는 것이 왜 관심 대상인지가 석연치 않다. 그야말로 ‘오지랖’ 아닌가. 반면 우리 정부가 약속한 1억 달러가 국회 반대로 무산된다면 윤 대통령은 그야말로 체면이 안 선다. 바로 직전 48초 환담에서 바이든이 1억 달러 약속에 대해 감사 인사라도 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바이든이 쪽 팔리는’ 것이 아니라 ‘바이든에 쪽 팔리는’ 상황이 된다 이 이야기다.

그런데 왜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다”고 해명했을까. 김은혜 홍보수석이 윤 대통령과 같이 녹취 음성을 몇 번씩 돌려가며 정확한 단어를 복기한 것이 아니라면 윤 대통령은 자기 말의 취지만을 홍보수석에게 일러줬을 것이다. 그래서 ‘바이든에 쪽팔려서 어떡하나’가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로 된 것이 아닐까. 그런 추론을 해 본다. 어쩌면 윤 대통령 본인도 정확한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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