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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네덜란드 기자 "위안부 만행, 일본군이 짓밟고 간 모든 곳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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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열 네덜란드 통신원]
스물일곱의 나이였던 1998년 짐 가방 하나 백팩 하나 달랑 메고, 이스라엘로 떠났던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이스라엘의 지역 공동체 키부츠 예히암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온 여학생과 이야기가 잘 통해서 단짝 친구가 되었다가 금세 애정 관계로 발전해서 아예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평생의 연인과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자신 삶의 절반 가까이를 유럽에서 살아왔고, 네덜란드 국적 취득을 위해 한국 국적은 포기했지만, 자신은 영원히 한국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람으로서 유럽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대화를 프레시안에 기고합니다. 그 첫 번째로 특이한 저널리스트 그리셀다와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필자)

20세기 식민의 역사를 추적하는 네덜란드 여성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셀다 몰러만스(Griselda Molemans, 58세) 180 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큰 키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색에, 동서양 모두의 얼굴 생김새를 가진 그리셀다 몰러만스는 수리남계 아버지와 인도네시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엮어 보았습니다.

장광열 : 벌써 3년 전이던 2019년 말 네덜란드 저널리스트가 일본 종군 '위안부'에 대한 책을 써서 곧 나온다는 말을 듣고, 책이 나오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서 사서 앞부분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코로나 팬데믹에 휩쓸려 그 책을 책장에 넣어 놓고 잊고 있다가 얼마 전 다시 책을 꺼내 보고 그 책의 저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먼저 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그리셀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관련 책을 내려고 했던 건 2004년에 네덜란드 할머니들도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였어요. 하지만 당시 하던 일 때문에 미뤄 두고 있다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위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어요. 처음에 제가 주목한 것은 2차 대전 당시 아주 많은 인도네시아에 살던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도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점이었어요.

그런데 조사를 할수록 이 문제는 전체를 다 다뤄야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다음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그리고 그 후 패전국 일본의 해외 파병군에 대한 승전국의 재판 기록들과 전쟁 당시 일본의 위안소 운영 실태에 대한 보고서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나 그 보고서는 몇 조각으로 분할 되어 비밀문서보관함에 들어 있었고, 어떤 보고서는 2026년까지 공개할 수 없게 묶어 놓은 걸 알게 되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1945년에 15세였다면 2026년에는 96세가 되니까 '위안부' 출신 여성은 대부분 죽었을 거라는 판단을 한 것 같아요.

책이 많이 두껍습니다. 제 책을 넘겨 보면 아주 예쁜 한국 처녀의 사진이 있어요. 그분이 2019년 1월에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예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분입니다. 꽃다운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 매춘에 동원된 할머니가 사회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셨지요. 정말 용기 있는 여성 인권운동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 전 일어난 일이고, 그동안 철저히 감춰진 역사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멀게만 느껴질 것 같아서, '위안부'할머니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나, 전쟁과 위안부 실태에 대한 문서 자료들을 많이 책에 담았어요.

프레시안

▲ 20세기 식민의 역사를 추적하는 네덜란드 여성 저널리스트 그리셀다 몰러만스(Griselda Molemans, 58세) 180 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큰 키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색에, 동서양 모두의 얼굴 생김새를 가진 그리셀다 몰러만스는 수리남계 아버지와 인도네시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그리셀다 몰러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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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셀다는 이미 오래 전 일어난 일이고, 그동안 철저히 감춰진 역사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멀게만 느껴질 것 같아서 '위안부'할머니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나, 전쟁과 위안부 실태에 대한 문서 자료들을 많이 책에 담았다. ⓒ 그리셀다 몰러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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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열 : 제가 책을 읽어보니 일본이 침략한 곳의 지명이 목차에 쭉 나열되어 있어서 정말 일본의 종군 '위안부'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보는 위안부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그리셀다 : 저는 아시아 침략전쟁과 이른바 종군 '위안부' 동원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지역에 35개국 출신에, 50만 명에 이르는 일본 제국의 종군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 일은 민간이 한 것이고 일본정부는 간여 안 했다든가 위안부들은 자발적인 매춘부라는 말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장광열 : 책 제목은 레이븐스 랑 오르로흐 (Levenslang Oorlog) 영어로는 라이프타임 워 (Life-time War) 입니다. 읽어보니 이 책은 학술서적 같지 않고, 딱딱한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351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탐사보도입니다. 책의 첫 이야기가 인상적이였어요.

그리셀다 : 제 책은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2013년 11월 23일 보도된 믿을 수 없는 기사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십 년 동안 죽은 채 자기 집에 누워 있던 인도네시아계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십 년 동안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가 십 년 동안 죽어 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까?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할머니의 가족들은 있을까? 이웃들은 왜 그걸 몰랐을까? 물세나 전기세, 가스요금 등 각종 공과금은 납부가 되었나? 노인 기초연금은 어떻게 받았을까?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은 베피(Beppie), 본명은 엘리자베스 도로시 더 브라운(Elisabeth Dorothy de Bruin), 1929년생이고, 2003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74세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이 소식이 보도된 다음 날, 할머니의 외동 딸 보니(2013년 당시 68세) 가 나타납니다. 이 딸은 왜 십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자기 어머니와 연락을 끊고 살았을까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버린 딸 보니, 어떻게 어머니와 십 년 넘게 연락을 아예 안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보니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럼 베피 할머니는 딸에게 마음을 닫고 살았을까? 그 이유는 이 딸의 출생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베피 할머니는 인도네시아 태생이었고,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이곳을 점령하던 1944년, 이제 갓 사춘기를 보내던 열다섯 살에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하여 아이를 가졌고, 1945년에 이 아이를 낳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할머니가 된 딸 보니의 얼굴은 한눈에 일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임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했는데, 인도네시아와 유럽계 혼혈인 베피의 부모님은 1948년경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베피는 다른 가족들보다 늦게 갓난아기 보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들어와 살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베피와 보니는 여느 집안의 엄마와 딸의 다정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베피는 보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아버지가 일본군이었을 거라는 걸 알았지요.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서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베피는 일본 '위안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50만의 '위안부'들처럼 열다섯의 꿈 많은 소녀는 원치 않은 아이의 엄마로 평생을 살아야 했고, 죽은 지 십 년 동안 주위의 누구도 연락을 하지 않는 외로운 노년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베피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같은 시대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나라들에 살았던 수많은 이름 모를 여성들의 삶과 다름없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7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아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가해자 중에는 단지 소수만 처벌 당했을 뿐 각자 자기의 터전으로 돌아가 한 가족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벌 받지 않은 이유는 처벌을 해야 할 무려 35개국에 달하는 피해자의 국가들이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방조자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아시아 나라들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수 많은 서구 열강들이 일본의 부녀자 강간과 '위안부'동원, 그리고 성적 학대, 폭력, 살인의 역사를 조사한 후에 비밀문서함으로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평양 전쟁의 승자였던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자신의 충성스런 속국으로 만들었고,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 군국주의자들 일부를 처벌하는 선에서 덮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을 민족의 해방으로 이해하고 있던 아시아의 민중들은 원래 지배자인 서구 열강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현실에 마주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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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셀다의 책 제목은 레이븐스 랑 오르로흐 (Levenslang Oorlog) 영어로는 라이프타임 워 (Life-time War)이다. 그리셀다가 추적한 '위안부' 탐사보도가 실려있다. ⓒ 그리셀다 몰러만스



장광열 : 전쟁이 끝난 지 거의 50년이 지나서야 위안부 실태가 밝혀졌습니다.

그리셀다 :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공개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많은 할머니들이 평생 감추고 살아 왔던 아픈 과거를 폭로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가공할 만한 전쟁범죄 진실의 파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가 있은 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 거대한 전쟁 범죄의 전말을 다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의 일부 극우인사들이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들이 자발적인 매춘부였고, 일본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독일의 나치 추종자들이 다시 등장해서 당시 유태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할 이웃나라라고 선언했다고요? 용서와 화해는 죄를 지은 자가 본인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진정 어린 사과를 할 때만 가능합니다. 

저는 아베 전 총리가 죽었을 때 이곳 유럽의 언론 보도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던 군국주의자입니다. 다시 욱일기를 달고 중국과 대항하는 강대국으로 살리는 게 그의 정치철학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온통 비판적인 목소리를 아예 보도가 안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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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공개 증언했다. 그리고 그 후 많은 할머니들이 평생 감추고 살아 왔던 아픈 과거를 폭로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가공할 만한 전쟁범죄 진실의 파편을 볼 수 있었다. ⓒWomen and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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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열 : 당신은 책 표지 뒷면에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해서 슬픈 완곡어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셀다 : '위안부'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용어입니다. 마치 전쟁으로 정신적 고통을 당하던 일본군 병사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안락한 위안소에서, 자발적으로 일본군의 위로를 해주던 여성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일본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곧이어 중국 상해로 쳐들어갔습니다. 일본의 본격적인 아시아 대륙 침략이 시작된 것이죠. 1932년 1월 28일 밤에서 29일까지 상해로 침입한 후에 무려 일본군의 강간 신고 건수가 223건이었습니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이 터졌고,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하였고, 가족 전체를 몰살시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딸을 강간하면서 부모와 형제들이 그걸 지켜보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나서 자살한 아버지도 있었고, 목을 맨 소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은 일본군의 미친 성욕을 채워주고,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군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점령지 곳곳에 위안소를 만들고, 일본의 매춘 여성만으로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일본과 조선, 간도 등에 있던 조선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을 이 강제 매춘에 동원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조선 여성들이 공장이나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상해까지 끌려왔다고 합니다. 위안소는 그 이름처럼 평온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소녀들이 처음 들어가면 신체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 검사는 군의관에 의해 행해졌고, 그중 몇몇은 군의관이나 장교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하고 위안소 방에 갇혀서 매일 매일 적게는 7~8명 많게는 50명의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남아 각지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마다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위안소를 만들고 현지 여성들과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 여성들을 동원해서 채워 넣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지만, 제 책이 한국어로 번역 되어서 많은 분들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장광열 : 일본군이 위안소를 체계적으로 운영했다고 하셨죠. 군대와 위안소는 밀접한 관계라는 의미겠죠?

그리셀다 : 일본 군국주의는 일본군의 부녀자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 아니라, 일본군 병력의 전투 병력의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해서 위안소에서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1918년~22년 간도 지역에서 일본군이 한국의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을 때 병력의 1/3이 매독이나 임질에 걸려서 전투병력에서 빠지게 되었고, 그중 많은 수가 죽었습니다.

이런 사태가 재발하는 걸 막기 위해서 위안소에서는 병사들이 의무적으로 콘돔을 사용하도록 했고, '위안부' 여성들은 성행위 후에 소독제로 중요 부위를 닦도록 했고요. 매주 군의관에게 신체검사를 받아서 성병에 걸린 여성에게는 강력한 항생제 주사를 놔 주고 회복한 후에 다시 위안소로 배치되도록 관리했습니다.

저는 당시 일본군에게 '위안부'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으로 취급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농장에서 키우는 젖소는 매일 매일 젖을 짜내고, 젖이 나오지 않으면 도살 당하지요. '위안부'들은 매일 매일 일본군 사병과 장교들, 군 사무관, 군대와 연관된 일본 사업가, 일본 회사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성 노예들이었던 겁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한 제 어머니, 큰 고모, 이모 나이의 50만 명이 넘는 그분들을 생각하면 슬픔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지옥 같은 위안소에서 탈출하다가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자발적인 매춘을 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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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전쟁기념관에 보관된 위안소의 이용 ⓒ 그리셀다 몰러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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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열 : 일본 정부는 민간업자들이 위안소를 운영했고, 자신들은 그 시설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리셀다 : 저는 책을 내기 위해서 일본군대가 짓밟고 간 모든 곳을 다 추적했습니다. 일본 본토와 한국과 대만 같은 곳에서는 청년 남자들은 학도병이나 황국의 군인으로, 여성들은 근로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차출해 갔습니다. 일본 천황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영광을 누리라고 선동했지요. 침략한 곳의 여성들도 쪽수를 채우기 위해서 끌고 갔습니다.

장광열 : 2차 대전 이후에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되찾은 네덜란드에서 일본군을 처벌이 진행되었나요?

그리셀다 : 네, 제가 자료를 모으는 중에 2차 대전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의 중심 도시 폰티아낙 지역에서 네덜란드 군 보안사가 일본의 '위안소' 운영에 대해서 조사해서 만든 보고서를 확보해서 그 내용을 책에 담았고, 얼마 전 8월 14일에 후속 보도를 냈습니다. 네덜란드의 군 정보국의 보고서 제목은 '보르네오 서부지역에서 일본 해군의 점령 기간 중에 있던 강제 매춘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1943년 상반기에 일본 해군의 헌병대, 또는 특별경찰부대가 일본군 부대나 일본계 회사에서 일하던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들어 버렸고, 모자라는 인력은 길거리에서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해서 위안소에 배치해서 강제로 매춘을 시켰다는 일본군 포로의 진술이 나옵니다. 이 보고서가 작성자는 네덜란드 군 정보국의 J. N. 하이브룩(Heijbroek) 대위였습니다. 일본군 포위가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자백한 중요한 보고서였는데, 이 보고서는 내부에서만 공유되었습니다.

비밀문서로 일반인의 열람이 불가능했던 것이었는데, 영국의 군 문서 보관소에 있던 이 보고서 전체를 입수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였습니다. 일본 황제는 신처럼 모셔졌고, 모든 일본과 한국 대만의 모든 황국 신민들은 황제의 백성으로 충성을 다하자고 부추겼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서구 열강들이 차지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일본은 강력한 황군을 만들고 그 병력을 잘 유지하고,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습니다. '위안부'는 "Of the Japanese Military, By the Japanese Military, For the Japanese Military," 즉 일본군의, 일본군에 의한, 일본군을 위한 성 노예였습니다.

'위안부' 충원을 위해서 민간 인신매매 브로커도 이용하고, 군대가 직접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이와 동시에 민간인 포주들에게 위안소를 운영하게 했지만, 위에서 말한 보고서에서도 나오듯이 모든 민간 위안소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다음 날 아침에는 전 일본 경제인 연합회(보국회)의 보르네오 지역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로 다 모이도록 했고, 자기 직원들에게 이 자금의 관리를 맡기고 관리 감독을 한 진술이 들어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소'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은 괴변입니다.

장광열 : 일본 정부는 이미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강제 노역이나 '위안부' 동원에 대해서 충분히 사과했고, 앞으로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고, 한국 등 피해자들의 국가 정부에 합의를 종용했습니다. 미국 정부도 한일 정부의 원만한 합의를 촉구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셀다 : 제가 지난 8월 14일 공개한 탐사 보고서(관련 기사 ☞ 일본 전쟁자금 추적한 네덜란드 기자…'위안부'의 몫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저는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 자금을 충원하는 역할을 두 개의 은행, 타이완은행과 요쿄하마 정금은행에 맡겼고, 이 두 은행이 일본군대의 해군과 육군의 현지 금고 역할을 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이 은행은 일본군에 자금을 공급하였고, 일본군은 그 자금으로 군수물자를 사들이고,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억눌렸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위안소에 요금을 내고 성행위를 했습니다.

위안소는 매일 아침 전날의 수입금과 장부 내역을 관리 업체에 내면, 그중 1/3을 위안소 운영업자에게 주었고, 나머지 2/3는 '위안부' 여성 몫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2/3이 자기 몫으로 책정되었다는 걸 듣지도 못했고, 일부 '위안부'들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면 운영업자는 '너희들은 돈 주고 사 온 여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 금액을 내게 갚아야 하고, 내가 제공하는 방에서의 숙박비, 식비, 청소비 , 옷과 화장품, 비누값을 제하면 너희들에게 돌아갈 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수익금의 2/3를 '위안부' 몫으로 쓰도록 했다는 건 눈속임에 불과하고, 실제로 이 금액은 위에 언급한 두 은행의 계좌 하나에 모두 저장되었고, 일본군 수뇌부는 이 돈을 다시 전쟁물자와 군인들의 급여에 썼습니다. 이 구조를 보면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운영으로 자국 군 병사와 장교,군 관계자 등을 상대로 전매사업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을 성노예로 부리면서 67%의 전매사업을 한 것입니다.

장광열 : 정말 위안부의 실태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의 나치의 만행에 결코 뒤지지 않아요. 작가님이 책을 쓰고 난 후 요즘의 근황은 어떠신가요?

그리셀다 : 이 책은 제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로 책을 썼고, 이 책이 영어와 한국어 일본어 등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네덜란드 밖에서는 폴란드어 번역 출판을 위해서 출판업자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요즘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탐사 활동과 저술 활동, 강연과 인터뷰 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책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나 유튜브 채널을 위한 짧은 동영상 제작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거대한 전쟁 범죄행위가 심판받지 않고, 가해자들이 활개 치고, 이 범죄의 주역들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자랑스럽게 방문하고, 이런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서 피해자 국가들이 입을 닫고 침묵하고 있는 것, 그 결과 피해자들과 역사의 진실을 아는 소수의 시민들만 정의의 실현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서고 있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우리는 2차 대전 기간 중에 독일 나치가 저지는 악행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대한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를 학살과 부녀자 강간, 폭력행위, 강제 매춘, 731부대의 끔찍한 생체실험 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그저 한일 두 이웃 나라 사이의 분쟁인 것처럼 프레임이 짜여 있는 듯합니다.

한국 여성들이 가장 많이 '위안부'로 동원된 건 맞지만, 일본군의 만행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은 어디서나 부녀자 강간을 일삼았고, 여성을 성 노예로 삼아서 소모품처럼 쓰고, 쓸모없으면 버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요즘을 신냉전 시대라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몇 달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다시 돌아온 점령자 러시아 군인에게 성적인 학대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언론의 증언입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동원에 대해서 국제 사회가 엄벌에 처했다면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민족이나 인종, 종교,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적국의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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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시민들이 러시아에 제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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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는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라 계속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현상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몫입니다. 저는 강대국들의 눈으로 보는 역사가 아니라 핍박받고, 수십, 수백 년 동안 억압당한 약소국 사람들의 눈으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적 이익 때문에 불의에 눈 감는 국가 정부에 맞서서 힘없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고, 영상으로 만들어 대중들이 역사를 바로 보게 하는 것, 이것이 저의 사명이라는 마음으로 계속 탐사 저널리스트로 살고 싶습니다.

장광열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그리셀다 : 저는 '위안부'에 대한 주변의 잘못된 인식 속에서도 용감하게 진실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와 '위안부' 사안을 넘어서 세상의 모든 여성들의 인권을 증진하는 운동에 헌신했던 김복동 할머니, 그리고 자기 일처럼 할머니들을 도왔던 이름 없는 많은 한국 시민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어요. 저는 그분들이 있었기에 그 역사를 알 수 있었고, 그분들의 열정에 힘입어 지금도 저널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책이 한국어로 출간되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감춰진 역사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 그리셀다 몰러만스는 어떤 사람인가?

1964년 생이고, 1979년부터엔터테인먼트, 예술, 스포츠 및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일해 왔습니다. 그녀의 인터뷰와 기사는 미국, 브라질,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및 홍콩의 국제 언론에 게재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Vrije Universiteit 자유대학교에서 미술사 및 고전 고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네덜란드 프로그램 NOS Studio Sport와 다양한 스포츠, 예술 및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진행자, 해설자 및 기자로서 TV 과제와 작문 기술을 결합했습니다. 

그리셀다는 광적인 농구, 테니스, 스쿼시 선수이자 수영 선수, 예술 애호가이며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및 포르투갈어에 능통합니다. 그녀는 네덜란드령도(현재의 인도네시아)에서 식민군으로 복무한 아프리카 군인 후손들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인도-아프리카 재단과 부르키나파소의 지역 개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나바 얌바가 재단의 이사입니다.

그녀는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인쇄, 오디오, 인터넷 및 TV 콘텐츠를 위한 시사,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및 자동차를 전문으로 하는 크로스미디어 언론사 QNA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서
Dochters van de Archipel (아치 섬의 딸들)
Met vlag en rimpel : Erfgenamen van Indie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의 피땀으로 빚어진 인생 역정 이야기)
In het voetspoor van de panter (가나 출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용병들의 발자취)
From New York to LA (뉴욕부터 LA까지)
Zwarte huid, Oranje hart(검은 피부, 오렌지색 심장)
Opgevangen in andijvielucht(채소 안다이피 냄새가 밴 피난민 수용소)
De vergeten krijgers (잊혀진 용사들)

[장광열 네덜란드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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