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3 (월)

[과학기술이 미래다] <60>담대한 통신혁명 구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자신문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2월 4일 체신부를 초도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동해의 외로운 섬 울릉도. 이 섬에 자리한 경북 울릉군청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울릉군청 내무과장입니다.” 1975년 2월 4일 오전. 전화를 받은 배재규 당시 내무과장은 갑자기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기에서 “나, 대통령인데 잘 들립니까?”라는 말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대통령이라니?' 깜짝 놀란 배 과장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배 과장=예? 누구십니까? ◇박 대통령=전화 사정이 좋아졌다고 해서 전화를 건 것인데 내 말이 잘 들립니까? ◇배 과장=네, 잘 들립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박 대통령=나, 대통령입니다. 시내전화처럼 잘 들리는데 그런데 누구요? ◇배 과장=네, 배재규 내무과장입니다. ◇박 대통령=외딴곳에서 수고가 많습니다. 불편한 점은 무엇입니까? ◇배 과장=없습니다. ◇박 대통령=낙도나 도서벽지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공무원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존재입니다.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참고 서로 도우며 일합시다. ◇배 과장=네, 각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불시에 울릉군청에다 전화한 경위는 이렇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체신부를 초도 순시해서 장승태 체신부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농어촌과 섬 지역에 전화 보급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라”면서 “전화교환기는 국내 기술을 총동원해서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해 개발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체신부 장관실로 자리를 옮겨서 전화 상태에 관해 장승태 장관과 이야기를 나눴다. 장승태 장관은 “전화 성능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져서 전국 어느 곳이든지 이 자리에서 통화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확인행정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이 그냥 넘길 리 없었다. “그래요. 그럼 지금 울릉군청과 전화를 연결해 보시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장 장관이 다급히 경북 울릉군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를 배재규 당시 군청 내무과장이 받은 것이다. 배 과장에게는 일생 잊지 못할 추억이자 가장 길고 긴장한 통화였다.

같은 해 8월 22일. 체신부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화교환기 국산 개발을 위해 1976년 1월에 전자교환기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그 당시 정부 내에서 전화교환 방식을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꾸는 일에 가장 적극적인 관료는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었다. 김재익 국장은 전자식 교환기 도입만이 전화 적체를 해소할 수 있고, 정보화 시대를 여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김 국장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 남덕우 부총리 비서실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를 발탁한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회고. “내가 서강대 교수로 있을 때 어느 날 그가 자료 수집을 부탁하러 연구소로 왔다. 그 후 내가 1968년 스탠퍼드대 대학원 초청으로 그곳에 갔더니 김재익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서 다시 만났다. 곽수일 전 서울대 교수도 유학생이었다. 몇 년 후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나를 찾아왔기에 그를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발령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 직제에 기획국장 자리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만 임명할 수 있어서 그를 내 비서실장으로 채용했다. 나는 관료조직의 폐쇄성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용휴 총무처 장관을 만나 설득했다. 김용휴 장관이 내 부탁을 받아들여 기획국장에 별정직 공무원도 임명할 수 있게 직제를 개정했고, 그를 기획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이었고, 경제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경제개발의 길목에서)

당시 김 국장은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많은 협박, 회유, 모략 등에 시달렸다. 김재익 전 대통령 경제수석의 부인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의 회고. “그는 1976년 기계식 전화를 전자식으로 바꾸는 일을 추진했다. 이 일을 하면서 협박과 회유, 모략 등 여러 시련을 겪었다. 그는 모략과 구설수에 올랐고 나중에는 협박도 받았다. 심지어 집으로 협박 전화가 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세력의 압박에도 굽히지 않고 전자식 교환기 일을 밀고 나갔다.”(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김재익 전 수석과 절친이던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도 전자식교환기 개발을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의 증언. “1970년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과학기술 정책수단' 10개국 공동 연구에 참석해 다른 참가국을 상호 방문해 여러 기술을 살펴보다 인도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현지 전자공학자들이 선진국의 도움 없이 전자식 전자교환기를 자체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델리의 전자통신연구소를 찾아가 보니 반도체를 이용해 전자식 교환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한국도 전자식 교환기 시스템을 개발하면 전화 적체 문제를 해결하고 통신 관련 산업도 키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하자 김재익 박사의 집으로 찾아가 '한국도 전자식 전화교환기 개발팀을 육성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당시 전화 사업 주무 부처는 체신부가 아니었다. 경제기획원과 상공부가 주역이고 체신부는 전화 설치 업무만 전담했다. 같은 해 10월 어느 날. 김재익 국장은 과학기술처에서 열린 회의에서 경상현 한국원자력연구소 에너지시스템연구실장을 만났다. 경 실장은 서울대 공대(화학과) 2년을 수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6년 매시추세츠공대(MIT) 대학원에서 공학(원자력)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알곤 국립연구소에서 1년여 근무하다가 벨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통신망 계획연구를 맡았다. 1975년 정부의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 계획에 따라 귀국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김 국장이 경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경 전 장관이 생전에 밝힌 대화 내용. ◇김 국장=벨연구소에서 어떤 업무를 담당하셨나요? ◇경 실장=미국에서는 아날로그 전자교환기가 나오는데 구식인 기계식 교환기를 계속 설치하는 것이 좋은지와 운영비, 장비 구입비 등 수요 측정에 대비해 경제성을 판단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김 국장=(반색하며) 잠시 시간 좀 내 주세요.

두 사람은 곧장 경제기획원으로 올라가 남덕우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만났다. 남 부총리가 “반갑다”며 악수를 청한 뒤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해 교환기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국내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한쪽은 아날로그 전자교환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기계식 교환기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 실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경 실장은 미국 사례를 들어 대답했다. “예,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은 기계식을 아날로그 전자교환기로 바꾸는 것이 대세입니다.” 남 부총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경 실장,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해 자문역 좀 해 주세요. 김 국장, 앞으로 경 실장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세요.” 김 국장과 경 실장은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2개월여 계속 만났다. 김 국장은 경 실장에게 아날로그 전자교환 기술 도입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경 실장은 나름의 방안을 마련해 1976년 초 김 국장에게 전달했다.

1976년 2월 27일. 남덕우 부총리 주재로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 경 실장이 제안한 전자교환기 도입 방안을 안건으로 상정했다. 회의에서 경제 장관들은 경 실장이 제안한 방안을 정부 정책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와 함께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를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맡기고 그 책임자는 경상현 박사가 맡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정부가 통신혁명을 향한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Copyright © 전자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