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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800년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부처의 가르침…법보사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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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해인사 전경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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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글·사진 | 합천=황철훈기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익히 들어서 알고있다’는 말은 실은 ‘잘 모른다’와 동의어다.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보고 경험해서 아는 것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합천 해인사가 그랬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수도없이 해인사를 다녀왔지만 정작 해인사의 진면목인 ‘팔만대장경’을 보지 못했다. 그저 오래된 문화재 중 하나, 불경을 새겨놓은 목판 정도로만 치부했다. 적어도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고백한다. 나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세계문화유산, 그 날의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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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봉황문에서 일주문을 바라본 풍경.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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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사찰 ‘해인사’
합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양산)와 큰 스님을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순천)와 함께 국내 삼보사찰(三寶寺刹)로 꼽힌다. ‘삼보(三寶)’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佛)·법(法)·승(僧) 3가지 보물을 말한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했다.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와 망상이 멈추고 우주의 참된 모습이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즉 진실한 세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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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일주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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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가 특히 돋보이는 건 세계문화유산을 두개나 품었기 때문이다. 바로 장경판전과 그안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기자가 해인사를 찾은 이유다. 해인사는 지난해 6월부터 사전예약자를 대상으로 팔만대장경을 공개하고 있다. 일반인 공개는 자그마치 800년 만이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대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천년 고찰 ‘해인사’를 찾았다.

‘가야산해인사’라고 쓴 일주문에 들어서자 족히 수백 년은 돼 보이는 거목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봉황문 앞에는 범상치 않은 자태의 고사목(느티나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라 애장왕(802년) 때 해인사 창건을 기념해 심은 나무다. 자그마치 1200여년 동안 해인사와 동고동락하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아쉽게 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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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봉황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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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느티나무). 신라 애장왕(802년) 때 해인사 창건을 기념해 심은 나무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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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두 번째 문인 봉황문은 해인총림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총림이란 승려들의 참선수행과 경전 교육, 계율 교육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체계와 시설을 갖춘 대형 사찰을 말한다. 봉황문에는 사천왕상 대신 사천왕을 그린 탱화가 양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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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해탈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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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구광루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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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이 해인사로 간 까닭은?
3번째 문인 해탈문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구광루를 마주한다. 이어 계단을 올라 대적광전을 지나면 비로소 장경판전을 마주할 수 있다. 이곳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이다. 고려 때 처음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다시 만든 것으로, 원래 강화도 선원사에 있었던 것을 조선 태조때 이곳 해인사로 옮겨왔다. 대장경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다. 가야산을 마치 성벽처럼 두른 해인사는 왜구의 발길이 닿기 어렵고 몽골과도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어 안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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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장경판전’.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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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판전은 부처님의 말씀을 세긴 대장경을 모신 건물인 만큼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조선 초기인 1488년에 완성한 건물로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一’자 모양의 건물 두 채가 앞뒤로 자리하고 있었다가, 나중에 작은 건물 두 채가 동쪽과 서쪽에 각각 들어서면서 ‘口’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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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판전의 첫 번째 건물 ‘수다라장’입구. 해인사 팔만대장경 연구원 보존국장인 일한 스님이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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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신비를 더하는 장경판전의 비밀
장경판전의 첫 번째 건물은 ‘수다라장’이다. 문을 달지 않은 입구는 둥그런 모양의 출입구로 연화문으로 불린다. 이곳 입구에서는 일년에 딱 두번 춘분과 추분에 선명한 연꽃무늬 그림자를 감상할 수 있다. 수다라장을 지나면 넓은 중정이 나온다. 정면에는 두 번째 장경판전인 ‘법보전’이 좌우로는 동·서 사간판전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사간판은 해인사에서 자체 제작한 경판으로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을 위해 글 대신 그림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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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장과 법보전와 사이에 자리한 서사간판전. 좌우 건물의 2층 창문의 상하 크기가 서로 반대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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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법보전 ‘비로자나불’ ②수다라장 입구 ③수다라장 나무 창살사이로 팔만대장경이 보인다. ④ 수다라장 입구에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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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대장경과의 영접은 법보전에서 이뤄졌다. 우선 영접에 앞서 인솔하는 스님이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판전안에 들어갈 때는 최소한의 복장 규정을 지킬 것(반바지나 짧은 치마는 바지로 갈아입고 하이힐과 슬리퍼는 고무신으로 갈아신기), 대장경은 물론 건물도 일체 손대지 말 것(손에 묻은 땀 등으로 부식될 수 있음), 마지막으로 절대 허락없이 사진 찍지 말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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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전 내부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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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전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서늘함이다. 건물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날숨과 들숨을 반복한다. 마치 천장 곳곳에 회전하는 선풍기를 달아놓은 것처럼 피부를 타고 흐르는 공기가 느껴진다. 비밀은 창문에 있다.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각각 창문이 나 있는데 창문 크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건물의 앞쪽 창문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다면 뒤쪽 창문은 반대로 위가 크고 아래가 작다. 이는 원활한 공기의 흐름을 통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경판의 변형을 막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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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전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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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가야산 중턱에 자리한 장경판전의 입지도 한몫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판전 건물을 비스듬히 스쳐 지나고, 습기를 머금은 동남풍은 판전을 타고 돌면서 건물 내부의 적당한 습기와 온도를 유지시킨다.

장경판전 내부는 2층 높이까지 대장경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하지만 드넓은 공간 어느 한구석에도 날짐승의 흔적은 물론 거미줄조차 발견할 수 없다. 현대과학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일이다. 바닥은 마치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듯 딱딱하고 매끈하다. 전통 방식인 ‘강회다짐’으로 바닥에 숯과 소금, 황토와 회를 층층이 다져놓았다. 숯과 소금으로 습기를 조절하고 해충의 발생과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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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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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장경은 현대 도서관의 도서 분류 시스템을 능가한다. 대장경은 총 1514종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경의 순서를 별도의 대장목록이라는 목판과 책으로 대장경의 배열 순서를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경판에 새겨진 글씨의 정교함과 일정함은 놀라움 자체다. 필사 담당자들은 일정한 서체를 유지하기 위해 1년 가까이 훈련을 거듭했고, 판각 담당자는 글자 한 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올렸다고 한다. 대장경을 만드는 과정 하나 하나가 성찰의 시간이자 수행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대장경판은 재료부터 특별했다. 단단한 수종 중에서도 특히 산벚나무가 많이 쓰였다. 또 채벌한 원목은 갯벌에 3년 이상 묻었다가 다시 1년 간 소금물에 삶고 찌기를 반복했다. 갈라지거나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판각이 마무리 된 경판은 옻칠해 말린 후 네 귀퉁이엔 구리 장석을 둘러 완성했다.

특히 경판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마구리 부분은 글자가 양각된 부분보다 앞뒤로 약 5㎜ 이상 더 두껍게 제작했다. 경판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막고 경판 사이의 공기 흐름을 원활하게 해 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68~78㎝, 세로 24㎝, 두께 2.6~4㎝며, 무게는 3~4㎏이다. 경판은 평균 한 줄에 14자씩 23줄을 앞뒷면에 새겼다. 경판 한 장당 644자를 새긴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판 수는 총 8만1352판으로 여기에 새겨진 글자를 모두 합하면 5239만 688자에 이른다. 읽는 데만 자그마치 30년이 걸리는 양이다.

그렇다면 경판을 모두 쌓으면 높이가 얼마나 될까? 경판의 평균 두께(3.3㎝)로 계산해 봤다. 총 2685m로 백두산(2744m) 높이에 육박했다. 대장경의 엄청난 양도 양이지만 경판에 새겨진 글자의 정교함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800년 세월을 품은 대장경에는 혼을 담은 글씨가 아로새겨있다. 사람이 새겼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교함에 보는 이들도 탄성을 쏟아낸다.

장경판전에서 마주한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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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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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차례의 소실 위기를 맞은 ‘팔만대장경’
대장경이 오롯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해인사는 조선시대에만 7번의 대화재를 겪었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됐지만, 장경판전 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수많은 전란도 피해 갔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과 승병들이 목숨으로 지켜냈고, 한국전쟁 때는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의 희생을 무릎 쓴 결단 덕에 소실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해인사로 숨어든 인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미군 군사고문단이 당시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장군에게 폭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김 장군은 문화재 소실을 우려해 이를 거부했다. 전시 명령 거부는 사형감이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내린 결단이었다. 결국 김 장군은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김 장군의 형인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해 다행히 즉결처분은 모면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총살감이 아닌 포상감이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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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전 내부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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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직접 관람하기 위해서는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 순례’ 프로그램 예약을 마쳐야 한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딱 2차례만 진행하며 인원도 회당 최대 20명까지다. 예약은 매주 월요일 낮 12시에 진행한다. 순례 프로그램은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앞에서 집결한 후 일주문과 봉황문을 거쳐 국사단, 해탈문, 법계탑, 대적광전, 대비로전, 수다라장, 법보전(내부순례) 순서로 진행된다. 민소매 등 노출이 심한 옷이나 슬리퍼·하이힐 등을 착용한 참가자는 장경판전 출입이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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