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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일본 전통시장 혁신 현장을 가다 (7) 국도변 휴게소 '미치노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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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30분 거리인 시즈오카현 이즈반도 동쪽에 위치한 이토시.

태평양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해변 휴양도시다. 지나가는 길에는 유명한 온천 지역인 하코네와 아타미도 있으며, 이토시를 거쳐 1시간 정도 더 내려가면 일본 최초의 개항지로 옛날 거리가 그대로 조성돼 있는 시모다라는 관광도시가 있다.

아름다운 해변에서는 각종 해양 스포츠도 가능해 여름이면 휴가를 즐기러 온 도쿄 시민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일본 전통시장을 취재하기 위해 7월 29일 늦은 오후 이토시를 방문했다. 주말을 앞두고 휴양객이 몰려들 만한 금요일이었다. 그것도 해안 휴양도시에는 가장 핫한 시즌이었지만 이토역 주변은 ‘적막’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한산했다.

일본 소도시 대부분이 그렇듯 이토시도역을 중심으로 전통시장 등 상점가가 형성됐다. 그러나 분위기는 ‘대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 을씨년스러웠다. 각종 음식점과 특산물 판매점이 쭉 이어져 있는 ‘역전중심거리’를 10분여 다녀봤지만 지나가는 행인이 달랑 2명뿐이었다.

식료품점 주인인 이치무라 씨는 “경기 침체 지속과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관광지로서 위상을 잃어버렸다”며 “상점가 부흥을 위해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있었지만 효과가 나오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이토시는 과거 화려했던 명성과 달리 이제는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2015년 7만1190명이었던 인구가 올해 6월 말 기준 6만5897명으로 7년 만에 7.4% 감소했다. 일본의 전통시장 중 다양한 혁신 노력을 통해 부활한 곳도 있지만 상당수는 장기 디플레와 인구 감소를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이토역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해변가에 위치한 ‘이토마린타운’은 천양지판이다. 도쿄부터 내려와 시모다까지 가는 국도변에 세워진 ‘미치노에키(道の駅)’라는 상업시설이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도로변에 세워진 역이라는 뜻으로 한국어로 표현하면 ‘국도변 휴게소’가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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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과 후지강을 배경으로 대관람차와 체험관까지 갖추고 설립된 후지카와라쿠자 미치노에키 전경. (후지카와라쿠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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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덴엔프라자 미치노에키의 농축산물 직판장에 쇼핑객들이 모여 있다. (임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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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시 외곽에 설립된 미치노에키 이토마린타운 판매관에서 여행객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임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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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도시 이토시 상점가 ‘썰렁’

▷인근 미치노에키는 젊은 층 ‘북적’

미치노에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철도와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국도로 유유자적 여행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를 겨냥해 만들어진 휴게소다. 어디든 상업시설은 집객력(集客力)이 중요한데 도시 중심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손님이 많이 다니는 외곽 국도로 찾아간 것이다. 기존 상업시설에서 혁신을 찾기보다 새로운 대체제를 찾아 나선 역발상의 혁신이다.

한국에서도 국도변에 위치한 자그마한 휴게소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일본의 미치노에키는 차원이 다르다. 널따란 주차장과 식당, 관광 안내소, 주유소는 기본이고 심지어 자그마한 테마파크, 숙박시설, 온천에 천문대나 미술관을 갖춘 곳도 있다. 복합 리조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 적지 않다.

이토마린타운 역시 도쿄 인근에서는 유명한 미치노에키 중 하나다. 강렬한 색감의 북유럽풍 외관으로 지어진 건물부터 눈길을 끈다. 뒤편 바다 쪽에는 요트 선착장이 있고, 온천숙박시설도 겸비했다. 이토시와 지역 금융기관의 공동출자로 설립된 제3섹터 기관이다.

폐점 시간인 오후 6시에 임박했지만 실내 상점가에는 쇼핑객이 적지 않았다. 해안도시답게 생선, 젓갈, 갑각류 등 해산물을 파는 상점이 많다. 젊은 층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 쇼핑하는 모습이 좀 전의 이토역 앞 상업 지역과 대비를 이룬다. 연간 방문객 200만명, 농수산물 판매액 200억원이라고 하니 이토시 전통시장의 쇠락을 충분히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미치노에키의 전통시장 대체 효과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뚜렷하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렸던 2020년 도야마현 전체 방문 관광객은 2212만명으로 전년 대비 36.8% 감소했다. 도야마현은 일본 최고 명산이 몰려 있는 ‘북알프스’로 들어가는 입구다. 설산으로 유명한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방문객도 35.4%나 급감했지만 인근 이시가와현과 연결되는 국도 304호선에 세워진 미치노에키 ‘후쿠미츠’는 120만명으로 전년 대비 7.5% 증가했다.

이렇듯 일본 미치노에키는 쇠락하는 지역 경제의 새로운 활로로서 역할이 커지고 있다. 전국 미치노에키연락회 사쿠라바 타쿠야 홍보 담당은 “여행객을 위한 서비스 제공 장소에 그치지 않고, 지방 경제과 방재, 생활의 거점으로 역할이 커지고 있다”며 “2025년까지 미치노에키를 유통 산업의 새로운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후지산이 훤히 보이는 시즈오카현 남쪽 후지시 인근에 위치한 미치노에키 ‘후지카와라쿠자’. 후지산에서 흘러내려온 후지강과 도쿄-오사카를 잇는 도메이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본래 고속도로 휴게소였으나 천혜의 주변 환경 덕에 가족 단위 방문객이 늘어나자 후지시에서 국도를 통해서도 입장할 수 있도록 바꾸고 다양한 시설을 추가했다. 대관람차, 천문대, 체험시설 등이 구비됐다. 소규모 테마파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시설을 즐기는 사이 어른은 지역 특산물 등을 편안히 쇼핑할 수 있다.

대규모 시설 투자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2000년에 설립된 후지카와라쿠자는 민간 기업과 지자체의 협력 모델로 성공한 경우다. 후지시가 시설을 제공하고 ‘후지마치즈쿠리’라는 기업이 운영을 맡아 미치노에키로 키웠다. 스가와라 미유 홍보 담당자는 “여행 도중 잠시 쉬러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미치노에키를 최종 목적지로 찾아오도록 만들자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목표는 적중했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방문객은 물론 후지산을 바라보며 고급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전망 레스토랑은 일본 실버세대의 인기 명소가 됐다.

1층 지역 농산물 판매장에는 후지산 인근에서 재배되는 ‘빨간 키위’를 비롯해 다양한 특산품이 판매되고 있다. 연간 방문객 390만명에 매출액도 2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스가와라 미유 홍보담당자는 “후지시 상권이 어려워지면서 지역 농가의 매출이 급감했는데 다행히 미치노에키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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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행인조차 드문 이토역 앞 상점가. (임상균 기자)


▶미치노에키 성공에 지역 경제 활력

▷인구 소멸 위기 산골 마을까지 되살려

2000m가 넘는 고산이 즐비한 산악지대인 군마현의 산골 마을 ‘가와바무라’. 도쿄에서 2시간 30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인구 3500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에 매년 2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 마을 입구에 설립된 미치노에키 ‘가와바덴엔프라자’ 덕분이다.

가와바무라는 1970년대만 해도 소멸 예정 지역이었다. 인구 감소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1980년대에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휴양시설이 들어오며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지만, 휴가철만 반짝 외지인이 올 뿐 적막한 산골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근의 인구 10만을 가진 누마타시에 합치라는 중앙정부의 제안도 거절한 가와바 주민들은 1996년 독자 생존을 위한 결단을 내린다. 농업과 관광을 결합하자며 휴양시설에 농축산물 판매시설을 세운 것. 마을과 주민들이 출연해 일종의 마을 협동 조합 같은 제3섹터 기업을 세워 운영을 맡겼다.

그렇게 시작된 가와바덴엔프라자는 도쿄돔 1.5배 넓이에 9개의 판매소와 13개의 전문식당을 가진 메머드 시설로 성장했다. 도자기 제작과 블루베리 따기 등 체험시설, 치즈·우유·맥주 등 생산 공장까지 갖추고 있어 다른 곳에 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만 한나절을 즐길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농축산물 판매소는 전적으로 가와바무라에서 생산되는 제품만 판매한다. 좋은 품질과 맛이 알려지면서 도쿄 긴자의 출장 판매소까지 개설하게 됐다. 도야마 쇼타 홍보 담당자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재료만을 사용하며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미치노에키 인기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품질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한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올 초에는 일본의 유명 여행 전문 포털인 자란에서 선정하는 2022년 미치노에키 랭킹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와바덴엔프라자의 성업은 마을에 톡톡한 경제적 수혜를 가져다주고 있다.

“지역주민 1000가구 중 400가구는 생산 농산물을 이곳에 가져와 직판을 합니다. 1년에 700만엔 이상 매출을 올린 주민도 있습니다. 그 외에 이곳에 고용돼 일하는 인력까지 합치면 마을 주민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미치노에키와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도야마 씨가 설명하는 미치노에키의 경제적 효과다.

인터뷰 | 도야마 교타로 가와바무라 촌장

시골이라고 싸구려 제품 금물…재방문율 60%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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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와바무라가 미치노에키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A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 대부분 소도시가 그렇듯 장기 침체에 인구까지 감소해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을을 유지할 수 없었다.

Q 농축산물을 판매한다고 이런 산골까지 여행객이 오겠는가. 집객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가.

A 미치노에키인 ‘가와바덴엔프라자’를 성공시키기 위해 술 제조 회사를 경영하던 나가이 쇼이치 사장을 2007년 영입해 혁신을 맡겼다. 그때부터 상품과 브랜드를 개발하고 디자인을 변경하는 등 혁신을 추진했다. 직원 의식을 바꾸기 위해 전 직원이 도쿄 디즈니랜드를 찾아서 고객에게 응대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Q 좋은 제품을 개발한다고 산골 마을까지 제품을 사러 온다는 보장이 없을 텐데.

A 미치노에키 내 각종 시설까지도 도쿄나 유럽의 고급 쇼핑가 못지않은 고급스러움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내장객 대부분이 도쿄나 사이타마에서 찾아오는 경제력을 갖춘 손님들이다. 산골이라고 싸구려 제품을 팔 거라는 인식부터 바꿨다. 비싸도 좋은 물건을 파는 곳으로 인식되자 재방문율이 60% 이상으로 급증했다.

Q 가와바덴엔프라자가 가와마무라에 어떤 효과를 가져왔나.

A 이곳 주민 중 80대 나이에도 1년에 1인당 100만~200만엔의 농축산물 판매 소득을 얻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대 판매자는 연간 700만엔에 달한다. 미치노에키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덕분이다.

[도쿄·군마·시즈오카 = 임상균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1호 (2022.08.10~2022.08.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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