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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정동칼럼] 김건희·박순애 문제, 연구자들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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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남자는 주걱턱 여자와 궁합이 좋고, 주먹코 남자는 키 큰 여자와 어울리며, 콧구멍이 큰 남자는 입이 크고 튀어나온 여자와 궁합이 맞는다, 는 식의 내용을 이것저것 남의 글을 함부로 Ctrl+C, V한 것과 얽어 써도 얼마든지 ‘박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대학과 학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부끄럽고 막막하다. 그런데 ‘김건희 박사’ 덕분에 오늘날 한국 대학과 학문 제도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으니, 문제를 똑바로 보고 바로잡아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대학과 학문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걸린 큰 문제다. 김건희들은 대학과 학문을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늘리고 또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수단으로 갈취한다. (지식정보와 상징자본이 제대로 분배돼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경향신문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장관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아마 서울대 교수직은 유지할 박순애의 경우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두 군데의 학회로부터 받은 ‘투고 금지’라는 중징계, 조교와 학생 대상 일상적 갑질, 음주운전, 자녀 입시 비리 의혹까지 생각해보면 가장 반교육적이고 반학문적인 자가 대한민국 교육부의 수장이 되었던 셈이다. 그가 어떻게 서울대 교수가 되었는지, 또 그런 이를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임명하게 만든 네트워크가 무엇인지는 중요한 문제 아닌가.

학문생태계가 붕괴되고 박사 실업자가 양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도 표절 같은 연구부정과 학위 장사는 광범위하다. 그 배경 중 하나에는 무엇보다 한국의 특권층과 지배계급의 욕망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의 연줄망을 통해 대학과 학술사회가 생산하는 가치를 갈취하고 약탈한다. 학위와 논문이 작지 않은 노력과 실력으로 얻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특권층을 위한 수익성 좋은 지대 추구와 상징권력의 재료가 된다.

김건희와 박순애의 연구부정과 전·현직 법무장관들의 자녀 입시 스펙 사냥도 전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다. 학벌과 학위 시장은 김건희 같은 이들 외에도 일부 정치인, 공무원, 사업가 또 일부 분야의 기자 등 다양한 지배계층에 의해 수요가 창출된다.

둘째, 대학과 학계의 부패와 연구부정은 대부분 대학 권력자와 정규직 교수들에 의해 기획·실행되고 또 다른 교수들의 묵과로 만들어진다. ‘김건희 박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학에는 정당한 공동체와 자치는 거의 멸절 상태인 채 치사한 각자도생과 맹목적 성과주의가 절대권력을 갖고 있다. 와중에 일부 대학과 그 권력자들은 학문의 진리성과 대학의 문화자본을 약탈하는 특권층의 마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그런 약탈이 만연한 이유는 한국 고등교육에 공공성이 없고 대학원과 학문에 대한 국가 정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학위 수여와 연구 진실성의 수호가 대학과 연구자들 스스로에 의해 수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대학에서 교수직과 학문이 가져야 할 ‘자율성’은 대학권력자와 교주가 권력과 소유권을 멋대로 휘두를 자유보다 훨씬 밑에 있다. 전체 대학의 80%에 달하는 한국 ‘사립’ 대학에는 자율의 기초여야 할 사회적 책임성과 역량, 즉 민주주의가 없다.

지난 8월5일 서로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가 다른 13개 연구자·교수단체가 같이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대를 비판하고 김건희 논문을 재검증하겠다는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연구부정과 학술생산의 문제점이 연구자들 스스로에 의해 제대로 문제제기되고 그 만연한 실상이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렇게 모인 것 자체가 뜻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성명의 내용과 발표 방식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우선 단체들이 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검증’ 같은 정치적 수사를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명에는 교수들의 자성과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이 부족했다. 공동 성명에서 제기된 ‘범학계 검증단’이 정치적 수사에 머물지 않으려면, 특권층의 대학 농단과 교수들의 광범위한 연구 부정을 다루는 자율기구로 확대·발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학과 학문의 공공성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즉 ‘김건희 박사’ ‘박순애 장관’을 만들어낸 미시적·거시적 배경인 학술사회의 관행과 현 대학체제를 바꾸기 위한 견지에서 모색·실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양심적이고 진지한 연구자들은 오늘도 책이나 실험 도구에 코를 박고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 진리 탐구와 학문의 기반 자체가 너무 부패해서, 연구자 자신들의 공동자원과 후속세대의 권익까지 침해당하는 현실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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