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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지금, 여기] 목이 곧은 이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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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부터 합천을 다녔다. 깨진 그릇 조각과 녹아내린 유리조각, 낡고 오래된 통장과 문서 같은 것들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땅거미가 드리워진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차로 한참 달려 들어가다 보면, 합천과 해인사가 놓인 지형을 ‘지극히 깊다’고 표현하던 건축사학자 전봉희 교수의 명료한 설명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옛날에는 영남 서부 내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합천 땅에 다다르기 위해 거친 산자락과 굽이치는 물줄기를 겹겹이 지나야 했을 것이다.

경향신문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물론 특정한 지역을 ‘멀다’거나 ‘깊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충분히 신중해야만 한다. 이 말은 서울이나 대도시를 ‘가까운’ 곳으로, 지역을 ‘먼’ 곳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과 서쪽은 험준한 소백산맥으로, 동쪽은 영남의 수많은 지류가 합류하는 낙동강으로, 남쪽으로는 지리산에서 출발해 해안을 따라 솟아난 산들로 둘러싸인 이 지역을 설명하는 데 마땅한 다른 표현이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지켜야 할 것이 주어지는 일이 잦았다. 예를 들어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봉안되기 전부터도 중요한 문서와 경전을 보관하는 보장처(保藏處)였다. 조선시대에만도 최소한 일곱 번의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나 장경판전에는 불똥 하나 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합천 일대에서는 실천적 유학자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앞다퉈 의병장이 되어 사직을 지키려 나섰다. 특히 3·1운동 당시에는 극렬한 폭력 투쟁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합천 사람들은 해인사에서 불공을 드린 후, 승려들과 함께 장터로 몰려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열일곱 번의 시위에 2만4000명이 참가했고, 아홉 번의 총격을 받았으며, 160명이 죽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숫자다.

이 목이 곧고 뻣뻣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싸움에 대한 충분한 보답을 받았던 것일까. 알 수 없다. 합천에 붙은 얄궂은 이름 중 하나는 ‘한국의 히로시마’다. 가뜩이나 농경지가 부족했던 데다 일제강점기에 더욱 생활이 피폐해진 합천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나 일본을 향했고, 군사 도시로 급성장하던 히로시마에는 일자리가 많았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곳에 있던 수만명의 합천 사람도 목숨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다행히 생명을 건졌지만 피폭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받던 이들도 많았으며, 그들의 자녀들 역시 적지 않은 아픔을 물려받아야 했다. 그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작은 배를 구해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합천은 원폭을 맞은 적은 없지만 수많은 원폭 피해자가 사는 ‘한국의 히로시마’가 되었다.

흰 장갑을 낀 채로 낡은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유리장에서 꺼내 촬영대에 옮겼다. 사실 수백, 수천년의 시간을 견뎌낸 것도 아니고, 대단한 학문적 의미를 지닌 물건들도 아닐 것이었다. 단지 조금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차곡차곡 돈을 모았을 옛 적립우편저금통장이라든가, 공부 욕심이 많았을 합천군 쌍책면의 누군가가 단정한 글씨로 필사해서 만든 ‘조선어-중국어-일본어-영어’ 단어장, 밥 짓고 국 끓이는 일상이 한꺼번에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듯한 그릇 조각들, 옛 사진들, 명부들, 증권들, 그리고 피해자가 품속에 넣고 다니며 덜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작은 금빛 부적 같은 것들.

조심조심 촬영대에 물건을 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사진가는 셔터를 누른다. 플래시에서 튀어나온 빛은 아주 잠깐 동안 전시장을 하얗게 비춘다. 잠시, 아주 잠시뿐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증언하는 이 물건들은 다시 유리장 안으로 돌아가 앞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을 견뎌낼 것이다. 합천군 합천읍에 있는 원폭자료관에 가면 전시관의 유리장 안에 들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것들 위에 목이 곧은 이들의 고통과 슬픔이 어둠처럼 내린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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