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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글로벌 약세장에…박현주 회장이 던진 화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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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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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회장은 업계에서 '은둔의 구루'로 불린다. 해외 출장이 잦고, 국내에 머무는 동안에도 언론 인터뷰 등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도 '무명(無名)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그의 눈은 늘 사회로 향해 있다. 한국 사회가 어떻게 새로운 성장 스토리를 쓸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룹 관계자들 이야기를 종합하면 최근 박 회장이 붙잡고 있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다. 대내적으로는 지역 불균형 해소, 대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세계 경제 블록화다. 지나친 서울 집중을 완화하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게 박 회장 생각이다.

'미국·유럽' 대 '중국·러시아'라는 큰 축을 중심으로 경제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또 다른 고민거리다. 박 회장이 생각하는 대응 방안은 국내 기업들이 더 많이 투자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관련해 그는 "제조업과 벤처가 강하고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글로벌 톱티어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25년간 투자 외길…'금융의 삼성전자' 꿈 이룬 승부사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6개월 전인 1997년 7월 1일, 박현주 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강남본부장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자그마한 사무실을 빌려 벤처캐피털 회사를 차렸다. 회사 규모는 단출했다. 함께한 직원은 달랑 7명이었고, 회사 자본금은 100억원이었다. 박 전 본부장은 본인 퇴직금과 사재를 털고 투자자의 돈도 보태 자본금을 마련했다. 거기에는 그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사뒀던 땅을 판 돈도 포함돼 있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든든한 창업 동지들과 함께였기에 자신감은 충만했다. 그와 함께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은 내로라하는 운용 전문가였고, 최현만 서초지점장은 관리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박 전 본부장 본인이 투자의 귀재였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늘 돈이 따라붙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대학생 시절부터 명동 증권사 객장을 누비며 주식 투자를 하는 것을 즐겼다. 명동에서 청년 주식 투자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에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하고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뒤 서른두 살 때 서울 중앙지점 지점장으로 승진하며 전국 최연소 지점장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일찍부터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흔이 되기 전에 내 회사를 가지고 싶다'며 돌연 사표를 던졌다.

이렇게 탄생한 미래에셋은 사반세기 만에 자기자본 17조3000억원을 갖춘 거대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7명이었던 직원 수는 미국, 영국, 홍콩, 중국 등 해외 법인과 사무소를 포함해 지난해 말 기준 1만2451명으로 늘었다. 25년 만에 자기자본은 1730배, 직원 수는 1778배가 됐다. 미래에셋증권 등 계열사 고객 자산 합계는 770조원이 넘는다.

박 회장은 동물적인 투자 감각으로 미래에셋그룹을 글로벌 투자금융회사로 키웠다. 업계 최초의 기록도 숱하게 세웠다. 1998년 국내 최초의 뮤추얼 펀드 '박현주1호'를 출시했고, 2001년에는 국내 최초의 개방형 뮤추얼 펀드를 선보였다.

회사 성장 과정에서 위기도 많았지만 박 회장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극복해냈다.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로 찾아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창업 반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이하자 우량 주식을 사고 채권에 투자해 큰 수익을 올렸고, 투자신탁회사들이 부실에 빠지며 투자자의 불신이 고조되자 '투명한 자산운용'을 내걸고 뮤추얼 펀드 돌풍을 일으켰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로 증시가 급락하면서 다시 한번 시련을 맞았지만 이를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선진 금융시장 연구를 위해 떠난 미국 유학에서 글로벌 금융그룹으로서의 미래에셋 청사진을 완성한 것. '금융의 삼성전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도 이 시절이었다. 박 회장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2003년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을 설립하며 글로벌 진출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래에셋그룹 성장사의 하이라이트는 대우증권 인수였다. 당시 미래에셋증권은 경쟁자들보다 2000억원 이상 많은 2조4000억원을 인수가로 제시했다. 2015년 말 대우증권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 회장은 "이병철·정주영처럼 불가능에 도전하겠다. 한국 금융산업과 자본시장의 DNA를 바꿔보겠다. 미래에셋그룹을 세계적인 금융회사로 도약시키겠다"고 했다. 당시 박 회장의 다짐은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해외 경영 성과가 두드러진다.

미래에셋은 국내 금융그룹 중 해외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경우 지난해 해외 법인에서 거둔 순이익이 2432억원으로 우리·하나·KB국민은행보다 많고 시중은행 1위인 신한은행(2568억원)과 맞먹는다. 지난해 국내 증권사가 거둬들인 해외 현지법인의 당기순이익(3627억원) 중 67%를 미래에셋증권이 차지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지난해 1분기 국내 금융사 최초로 해외 법인의 순이익이 국내 법인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해외 금융영토 확장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영국 등 세계 경제의 중심인 영미권은 물론 중국, 홍콩 등 중화권과 브라질, 인도, 베트남 등 이머징 국가에도 진출하는 등 전 세계 15개 지역에 34개 법인과 사무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글로벌 인수·합병(M&A)에서도 잇달아 성과를 내고 있다. 2011년 액티브 상장지수펀드(ETF) 강자인 캐나다 운용사 '호라이즌스(Horizons) ETFs'를 인수했으며 2018년에는 미국 ETF 시장의 신흥 강자로 주목받고 있는 ETF 운용사 '글로벌엑스(Global X)'를 인수했다. 당시 10조원에 불과했던 글로벌엑스의 운용자산 규모는 얼마 전에 50조원을 돌파했다. 또 최근에는 호주 ETF 운용사 '시큐리티스(Securities)'를 인수했다. 이는 국내 금융사가 해외에서 번 돈을 해외에 재투자한 첫 M&A 사례다.

"해외로 나가 돈을 벌어오는 것이 미래에셋의 존재 의의"라고 강조하는 박 회장은 매년 300개 이상의 딜을 검토한다. 현재 국내 경영 일선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지만 수시로 해외 곳곳을 방문해 투자 대상을 살피고, 현지 전문가들과 만난다. 박 회장은 "비행기를 타는 게 싫어 제주도도 가기 싫다"고 말할 정도로 해외 출장이 잦다. 박 회장의 해외 출장이 마무리되면 굵직한 M&A 소식이 들려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로벌엑스와 시큐리티스 인수 모두 박 회장의 해외 출장으로 얻은 선물이었다는 게 업계 얘기다.

▶▶ 박현주 회장은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경영학 강의를 수강하던 중 '자본시장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을 계기로 일찍부터 증권업과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양증권과 동원증권을 거쳐 1997년 미래에셋을 창업했다.2016년 대우증권을 인수해 미래에셋증권과 합병했다. 현재 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 글로벌 회장 겸 글로벌경영전략고문(GISO)을 맡으며 인수·합병(M&A) 등 해외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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