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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금에 두 번 죽은 셈…나와 가족에 가해진 국가폭력 지금도 안 끝나”[논설위원의 단도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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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빚고문’ 벗어난 이창복씨

경향신문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인 이창복씨가 지난 2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씨는 “어렵게 집을 장만해서 이렇게 집사람과 둘이 사는데 이것을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저항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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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월남해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도쿄대 박사과정 입학을 준비하던 중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됐다. 1975년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형,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8년간 감옥살이 후 1982년 석방됐다. 이후 학원·독서실 운영으로 생계를 꾸렸다. 노무현 정부 당시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 2008년 무죄가 확정됐다.


문재인 정부 때 해결했어야 할 문제…배임죄에 엮이기 싫다며 골치 아픈 일 지나쳐 버려 실망
아무 문제 없었는데 MB 정부서 불법으로 판례 바꿔…박근혜도 후보 때 해결 약속하고는 어겨
원금 5억 갚으려 집 팔아야 할 처지…사선도 넘었지만 가족 전체 풍비박산 등 말년이 너무 비참

‘최악의 사법살인’이라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인 이창복씨(84)에게 지난 20일 뜻밖으로 희소식이 전해졌다. 정부가 법원의 화해 권고를 받아들여 이씨가 물어야 할 국가배상금 반환 지연손해금(지연이자)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법원이 결정한 것을 정부가 뒤집으면 배임죄에 걸린다”면서 내내 미뤄온 일을 윤석열 정부가 한 것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날 “가지급 이후의 판례 변경이라는 이례적 사정으로 이른바 ‘줬다 뺏는’ 과정이 생겼다”며 “그래서 법무부가 소송 수행청인 국정원과 깊이 논의해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인혁당 재심 판결로 무죄를 확정받은 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가지급금을 받았지만 2년 뒤 대법원은 판례를 바꿔 받은 돈 중 4억9000만원을 반환하라고 했다. 연 20%의 높은 연체이자율 때문에 토해내야 할 돈은 그 사이에 원금 외에 이자만 9억6000만원으로 늘어났다. 시민단체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피해자들에게 고문을 가하더니, 이제는 국가가 ‘빚고문’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23일 경기 양평에 있는 이씨의 집을 찾았다. ‘권리자 대한민국 국정원’의 이름으로 강제 경매에 부쳐진 바로 그 집이다. 이씨는 한반도 모양의 정원을 보여주며 몸소 가꿨다고 했다. 이씨는 이자는 내지 않게 됐지만, 원금 5억원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야 할 처지다. 이씨는 “그때 그 돈을 받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며 “두 번 죽는 결과가 됐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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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부가 지연손해금을 받지 않기로 했는데, 그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나.

“문재인 대통령 때 해결했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고심만 하다가 (경남 양산) 평산마을로 가버렸다.”

이씨는 이번 결정을 내린 법무부에 대한 소회 대신 대뜸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을 표출했다. 그러면서 국가인권위가 2019년 3월 문재인 정부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구제에 나서라고 의견을 제시한 사실을 거론했다. 실제 2020년 7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박 전 원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국정원장 때 이걸 마지막 순간에 합의해서 법무부에 넘겼는데 실행을 못하더라. 법무부와 검찰에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자기네(문재인 정부 인사)가 배임죄에 엮이기 싫다면서 골치 아픈 일을 지나쳐 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 집이 언제, 왜 압류된 것인가.

“2017년 국정원에서 이 집에 압류를 걸어 경매를 당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가 소를 제기했고 지금까지 끌어왔다. 그때 (가지급금을) 안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법원에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해소해준다는 것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발단은 법원이 인혁당 조작 사건으로 오래 고생한 피해자들을 위해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돈을 미리 지급해준 것이었다. 1·2심에서 15억여원의 배상금 판결을 받은 이씨는 법원의 배려로 3분의 2에 해당하는 10억9000만원(위자료 6억원+지연손해금 4억9000만원)을 미리 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2011년 돌연 판단을 바꿨다. 이씨에게 지급한 지연손해금을 국가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때(1975년)가 아닌 변론종결일(2009년)부터 기산해야 맞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지연손해금 4억9000만원을 도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런 결정 탓에 이씨는 그때부터 무려 11년 동안 ‘빚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씨 소유 양평 집의 토지·건물 등기부등본에는 2013년 10월11일자로 ‘권리자 대한민국’ ‘청구금액 4억9600여만원’의 가압류 사실이 적혀 있다. 2017년 2월24일 ‘권리자 대한민국(국가정보원)’ 명의의 강제경매 개시 결정도 기록돼 있다.

고통을 당한 것은 그만이 아니다. 이씨의 부인과 자녀에게도 배상금이 지급됐는데 이들 역시 받은 돈의 절반을 토해내야 했다. 그 돈으로 집을 샀던 아들 이송우씨는 직장으로 차압이 들어올까봐 서둘러 집을 팔았다. 그사이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언제 집을 살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부인도 돈을 갚지 못했고, 이씨의 다른 자녀도 온갖 고충을 겪었다. 이자만 겨우 갚을 뿐 원금은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이송우씨는 “가족 전체가 풍비박산이 됐다”고 표현했다.

- 이 집은 어떻게 마련했나.

“감옥에서 나온 후 취직하려 해도 길이 막혀 할 수 없었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고자 온 힘을 다해서 학원도 해보고 독서실도 운영했지만, 이래저래 손해를 봤다. 고문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불면증까지 왔다. 신경과민으로 아내는 물론 아들까지 힘들게 했다. 서울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해서 학원과 집을 전부 정리해서 1994년 이곳 양평으로 옮겼다.”

- 당시 받은 배상금은 어떻게 썼나.

“ 전에 사둔 땅에 배상금으로 이 집을 지었다. 그리고 4·9통일평화재단에 기금도 기부했다.”

4·9통일평화재단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8년 설립했다. 이들이 사형당한 날이 1975년 4월9일이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받은 배상금의 상당액을 4·9재단에 기금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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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9일 인혁당 사건 추모제에서 4·19합창단이 첫 공연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이 이창복씨. 사월혁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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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왜 나왔다고 보나.

“원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니까 문제를 삼은 것이다. 사법부를 지탱하는 대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입각해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불법을 해서 판례를 바꾼 것이다.”

- 판례변경을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원래 판례 변경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하는데, 소부에서 이렇게 결정해 우리가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다. 법에 저촉되는 것이 있으면 파기환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파기자판(원심을 깨고 직접 판결)을 해버린 거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무도한 일을 할 수가 있나. 우리는 두 번 죽는 결과가 됐다.”

- 대법원 판결 때 현장에 있었나.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고함을 지를 뻔했다. 겨우 참고 (법정) 밖으로 나왔다. 대법관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라.”

이창복씨뿐 아니라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가족 77명은 2009년 총 490억원의 가지급금을 받았는데, 2011년 판례 변경으로 211억원을 물어내야 했다. 사법살인을 저지른 국가와 사법부가 두 번 고통을 가한 것이다. 이씨의 이야기는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유가족들이 항의를 하자 사과를 했다. 이때 우리 문제는 자기가 당선되면 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 약속이 지켜졌나.

“아니다. 국정원이 나서서 과잉배상금을 받아내려고 했다.”

- 인혁당 관련자 중 유독 이 선생님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분들은 배상금을 받아서 썼든지 자식에게 줘버렸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집을 내 이름으로 갖고 있으니까 압류를 시켜버린 거다. 이렇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네 명이 압류당했다.”

- 연체이자율이 20%였다. 이자가 10억원에 이를 때까지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렵게 집을 장만했는데 이것을 가져간다고 하니, 할 수 있는 데까지 저항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도 20% 이자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나.

“이런 최후의 생각도 했다. ‘가져갈 테면 빼앗아가 보라.’ 하지만 사람이 가야 할 정도가 있다. 나라를 위해 걱정했는데 이렇게 또 죄인을 만들었다. 아버지(박정희) 때는 그냥 인권유린을 통해 사건(인혁당 사건)을 조작해서 죽이더니, 딸(박근혜)이 돼가지고는 이자금을 갖고 죽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10억원을 배상받고 과잉 배상이라면 물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질문에 이씨는 고개를 흔들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엄혹한 시절에 고초를 겪고 죽음의 사선을 넘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그때 3선개헌이나 유신헌법에 반대한 사람들은 시대를 걱정하고 후손들의 앞날을 생각한 사람들 아니냐.”

이씨는 독학으로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마친 뒤 도쿄대 교수로부터 (박사과정) 입학내정 허가서를 받아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으로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

“내가 겪은 고통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해서 많다 적다 이야기할 수 있나. 부끄러운 일이다.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참, 시대에 대한 아픔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고문 후유증이 심했다는 말에 차마 어떤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인터뷰 후 아들 송우씨에게 전화로 물었다. 송우씨는 “아버지는 당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며 “한 인터뷰 내용에서 구타를 많이 당했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인혁당 사건에는 어떻게 연루됐나.

“선언문이라는 것들을 보고, 그런 문제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행위다. 그런 걸 가지고 붙잡아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으로 만들기 위해 꿰맞춘 것이 인혁당 사건이다. 학생운동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 이게 필요했다. 일생을 살면서 민주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이 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내 개인의 세계관이 내 철학의 학문과 연결돼 있다.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것들이 시대의 부름에 내가 끼어들어간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박정희 정권은 왜 그런 사건을 조작했다고 생각하나.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는데 기소거리가 되지 않았다. 2차도 마찬가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정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시민의식을 갖고 저항했다. 학생들을 두드려 잡고 배후에 1차, 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인혁당 재건위’라고 이름 붙인 거다. 우리는 그런 이름도 몰랐다. 완전히 조작한 사건이다.”

- 몇년형을 선고받았나.

“그때는 군사재판을 받았다. 보통군법회의·고등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때렸다. 1심에서 20년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가족 면회를 한 번도 못했다. 세상에 이런 야만 국가가 어디에 있나. 1년이 지나서 가족 면회를 처음 했다. 박정희 정권이 (사건을) 조작한 것이 드러날까봐 우리를 풀지 않고 오래 (감옥에) 살게 했다.”

-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했나.

“아내가 많이 고생했다. 교직생활을 해서 집안을 이끌어가고 자녀를 키웠다.”

이씨가 부인을 부르더니 소개했다. 아들 송우씨는 “아버지는 편히 내려놓자고 하는데 어머니는 지금 상황(국가에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다. 1974년 이씨와 가족에게 가해진 국가 폭력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걷는 것도 힘들어서 그냥 집에 있다.”

- 이자는 면제됐지만 원금 5억원은 갚아야 하는데.

“글쎄, 지금 우리로서는 그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 이 집을 팔아서 갚고 남은 돈으로 어디론가 나앉아야 될 것인가, 집사람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 말년이 너무 비참하다.”

경향신문

윤호우 논설위원


윤호우 논설위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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