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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詩想과 세상] 나를 막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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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정채원(1951~)

자화상 같은 이 시는 막힘과 뚫림, 멈춤과 흐름의 인생사를 피리와 노래, 춤을 통해 보여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인생은 기쁨·즐거움의 ‘흐름’과 노여움·슬픔의 ‘멈춤’이 반복된다.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내 삶만 불행한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른 뒤 되돌아보면, 슬픔 속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된다. 휴지(休止) 같은 막힘이나 슬픔과 방황의 한때도 필요한데, 늘 막힘없는 흐름과 좋은 결과만을 원한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다.

욕심은 둘째치고, 가슴에 구멍을 내기 전의 상태는 답답하기만 하다. 스스로 “피리가 되”는 건 전화위복이면서 궁여지책이다. 자신을 자각하는 시간이지만 그것도 잠깐, 가까스로 뚫은 구멍은 다시 막힌다. 막힌 가슴에 숨을 불어넣으면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원해서 부르는 노래도 아니고, 혼자 추는 춤이다. 숨구멍이 막히면 생명이 끝나므로 노래는 비명이고, 춤은 몸부림이다. 인생의 무대에 오른 것도 자의는 아니다. 그러면 다음 공연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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