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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주 52시간제 유연화’…우려 커지는 윤석열식 노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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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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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가 23일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의 핵심은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그게 “노사 모두를 위한 선택권 보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심각한 장시간 노동 국가인데다가 노동자와 사용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협상하기 어려운 한국 실정에서 이같은 정책 방향은 결국 노동 착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동계는 사실상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의 이날 발표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된 개혁 방안은 연장 노동시간의 관리 단위를 ‘주 단위’에서 ‘월 단위’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현재는 법상 일주일에 12시간까지만 연장 근로를 할 수 있다. 기본 40시간에 12시간을 더해 주 52시간을 맞추는 구조다. 그러나 월 단위로 바꾸게 되면 한 달 연장 노동시간 48시간(4주 기준)이라는 한도만 지키면 된다.

일주일 내의 연장 노동시간 한도는 없어지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기본 40시간에 연장 48시간을 더해 일주일에 총 88시간까지 일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날 입장문에서 “아무런 제한 없는 초장시간 노동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라며 “실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연장 노동시간의 월 단위 확대 관리가 아니라 ‘1일 단위’의 최장 노동시간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 확대도 마찬가지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1~3개월 단위(정산기간)로 52시간 이상을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이 정산기간을 1년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이번 노동부 발표에 어느 기간까지 늘릴 것인지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일별 또는 주별 최대 노동시간 한도를 정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고스란히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게 된다.

노동부는 이같은 노동시간 유연화 방안을 개별 사업장에서 시행할지는 ‘노사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14%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중 하위권인 상황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업무량이 많을 때 기업이 집약적으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계는 연장 노동시간의 총량 관리 단위 확대나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확대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긴 노동을 하면서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이날 발표에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 조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담기지는 않았다. 다만 브리핑에서 이 장관은 “특정 주에 무제한으로 근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보호 조치가 반드시 병행될 것”이라며 ‘11시간 연속 휴식’과 같은 방안을 언급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이 선택적·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더라도 근무일과 다음 근무일 사이에 11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을 주도록 한 내용이다. 다만 이는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때는 예외로 돼있다.

경향신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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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노동시간 단축을 주요 노동정책으로 내세운 반면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빠져있었다. 이 장관은 ‘실노동시간 단축’이 정부 기조라는 점은 명확하다고 했다. 실노동시간 단축의 방법으로는 업무량이 많을 때 초과근무를 하고 그 시간을 저축한 뒤 업무량이 적을 때 휴가 등으로 쓰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휴일·휴가 활성화, 재택·원격 근무 등 근무방식 다양화를 제시했다. 이 장관은 “실근로시간 단축은 시대적인 흐름”이라며 “실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줄일 수 있도록 정보 제공과 기업 컨설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이 장관은 연공 중심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는데, 기본적으로 일선 사업장의 임금체계는 노사 당사자들이 정하는 것인 만큼 노동부가 개입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또 노동계는 연공 중심 임금체계의 문제점은 일부 공감하면서도,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는 중장년 노동자 임금이 깎일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본다. 이 장관은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된다”며 “장년 근로자가 더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임금체계의 과도한 연공성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노동부는 제도 개편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래 노동시장 연구회’에서 논의할 예정이며 이 연구회에서 객관적인 실태를 파악하고 노사 의견도 수렴한다고 했다. 연구회의 연구 결과를 노동부가 받아 검토한 끝에 최종 제도 개편 방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노동부의 제도 개편은 쉽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시간 규정은 근로기준법에 정해져있기 때문에 바꾸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 현재 국회가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정부의 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장관은 이번 노동시간 제도 개편방향이 주 52시간제의 기본 틀은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노동계는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한다고 보고 있어 향후 갈등이 예상된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내고 “이 장관이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정책은 전혀 없이 편법적인 노동시간 연장을 위한 정책만 내놔 깊은 실망과 분노를 표한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은 “정부가 실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으나 말 뿐이고 대책은 거꾸로”라며 “이번 발표는 사용자단체 요구에 따른 편파적 법·제도 개악 방안”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노동부, ‘일주일에 12시간 이상 초과 근무 가능’ 추진한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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