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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세금 안내고 아들에게 건물 사주려던 시도는 왜 꼬였나[판결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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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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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2003년 아들 명의로 건물을 샀다. 건물 등기도 아들 명의로 했다.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고 아들에게 건물을 사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혼, 사망 그리고 ‘명의신탁’에 관한 법리에 발목이 잡혔다.

■이혼, 사망 그리고 ‘명의신탁’
2년 후 A씨는 아들에게 건물 명의를 친척 B씨 앞으로 이전하라고 했다. 아들이 이혼을 당할 상황이라 건물이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매매 계약을 가장해 건물 소유권 등기를 B씨 명의로 이전했다. 아들의 이혼이 마무리되자 A씨는 건물 등기를 다시 아들 명의로 돌리려 했으나 ‘세무당국의 의심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역시 매매 계약을 한 것으로 꾸며 건물 등기를 당분간 딸 명의로 돌려놓았다. 그러다 A씨가 갑자기 사망했고, 아들과 딸은 건물이 서로 자기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다.

1·2심은 건물이 아들 것이라고 했다. 타인의 명의를 빌리는 ‘명의신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나 대신 명의자가 상대방과 계약을 하는 ‘계약명의신탁’과 내가 직접 계약을 하되 명의만 타인의 것을 빌리는 ‘등기명의신탁’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계약명의신탁’의 경우 ‘명의를 빌려준 자’이고, ‘등기명의신탁’의 경우는 ‘나’이다. 재판부는 A씨가 아들 명의로 건물을 산 행위를 ‘계약명의신탁’으로 판단했다.

법은 ‘명의신탁’을 금지하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명의를 빌려준 자’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물권 변동’은 무효이다. 다만 거래 상대방이 ‘나’ 대신 계약을 체결한 자(명의자)가 실제 당사자라고 믿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선의의 제3자’가 거래 무효화로 돈을 돌려줘야 하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래 상대방이 계약명의신탁임을 몰랐을 경우에 한해 ‘명의자’를 거래 당사자로 인정하고 소유권 이전 역시 유효한 것으로 법은 본다. 1·2심은 A씨가 아들 명의로 건물을 산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A씨 아들을 거래 당사자로 인정하고 소유권 등기도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친척과 딸로 명의가 바뀐 건 실제 거래가 아니라 ‘명의자 변경 행위’에 불과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건물은 누구 것?

그러나 대법원은 A씨의 거래를 ‘등기명의신탁’으로 봤다. 계약 당사자는 아들이 아니라 A씨라는 것이다. 매매계약 당시 아들은 해외에 있었고, 돈도 아버지가 댄 점을 근거로 들었다. 파기환송심에서 이 판단이 확정되면 건물은 아들 것도, 딸 것도 아니게 된다. ‘당사자가 아닌 명의자’인 아들로 이전된 소유권 등기는 ‘명의신탁으로 인한 물권 변동’에 해당돼 무효가 되고, 무효인 이 등기를 이전한 딸 명의의 등기는 ‘원인무효’이기 때문이다. 즉 건물의 소유권은 A씨에게 건물을 판 원소유주에게 있는 셈이 된다.

다만 매매계약 자체는 유효하다. ‘당사자’인 A씨에게는 자신의 명의로 건물 소유권 등기를 이전해달라고 건물 원소유주에게 요구할 권리(채권)가 있다. A씨가 사망했으니 아들과 딸은 상속지분 만큼 채권을 상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채권의 소멸시효는 10년이다. 건물을 산 지 20여년이 지났으니 소멸시효 진행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채권은 이미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설혹 채권이 살아있다고 해도 A씨 가족이 건물을 온전히 가질 수는 없다. 채권을 상속하려면 상속세를 내야 한다. 수차례의 명의이전에 따른 증여세도 내야 한다. 법은 ‘명의이전도 증여에 준하는 행위’로 본다. ‘명의신탁’에 대한 과징금도 물 수 있다. 건물 가액의 최대 30%가 부과된다. 다 합하면 건물 가격보다 많을 수 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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