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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막 오른 미·중 남태평양 외교전…태평양 국가들의 기대와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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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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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도서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과 중국의 외교전이 본격화되고 있다. 남태평양 도서 국가들에서는 미·중 간 경쟁이 기후위기 해결에 도움되기를 기대하면서도 지역에 경제적 예속, 군비증강을 불러올 것이라는 불안감도 번지고 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26일 남태평양의 도서국 연쇄 방문의 첫 일정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솔로몬제도를 방문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 부장은 전날 솔로몬제도에 도착해 이날 수도 호니아라의 총독부에서 파테슨 오티 총독 대행을 예방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수교 이래 양국 관계는 전방위적 발전을 이룩했고 호혜적 협력이 지속적으로 추진돼 양 국민에게 여러 이익을 줬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자국 필요에 따라 중국 함정을 솔로몬제도에 파견하고, 현지에서 물류 보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안보협정을 지난달 솔로몬제도와 체결했다.

왕 부장이 이끄는 중국 대표단은 이날부터 6월4일까지 솔로몬제도, 키리바시, 사모아, 피지, 통가, 바누아투,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등 8개국을 공식 방문한다. 미크로네시아연방, 쿡제도, 니우에 측과는 화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남태평양 10개국 모두와 접촉하는 셈이다.

왕 부장의 이번 순방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출범하고 쿼드 정상회의를 열며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구체화한 데 대한 대응 차원으로 풀이된다. 그는 이번 순방 계기에 방문국들과 자유무역협정(FTA) 구상과 안보 협력 강화 방안을 담은 이른바 ‘포괄적 개발 비전’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AFP통신 등은 전날 보도했다. 비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중국은 현지 경찰 훈련, 지역 내 사이버 안보 관여, 각국과의 정치적 관계 확대,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권 확대 등을 얻게 된다.

남태평양은 2차 대전 이후 전통적으로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영향권에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의 해상봉쇄를 뚫고 대만문제 등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남태평양 국가들에 공을 들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호주의 싱크탱크 로위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부터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이어 남태평양 국가들에 두번째로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중국은 남태평양 수교국 10개국과 모두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협력을 체결하고 인프라 건설 등을 지원하고 있다.

왕 부장이 이번에 찾는 남태평양 국가들은 세계 인구의 0.1%에 불과한 소국들이다. 하지만 유엔에서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한다. 유엔총회 투표시 6.7%가 이들 국가의 몫이다. 미국의 태평양 군사거점인 괌과 쿼드 동맹의 한 축인 호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전략적 의미도 크다. 대만과 수교한 14개국 가운데 마셜제도, 팔라우, 나우루, 투발루 등 4개국이 남태평양에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외교 강화를 통해 이들 국가들의 대만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 중·러의 대결이 심화되는 신냉전 구도에서 남태평양은 중국에게 더욱 중요한 지역이 됐다. 남태평양은 인도·일본·호주 등의 국가들과 연합해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뚫을 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해양공간의 40%를 점유하는 남태평양은 중국이 중남미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놀란 미국 등 관련국들도 맞대응에 나섰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25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왕 부장의 남태평양 국가들과 다양한 협정을 모색하고 있는 데 대해 “성급하고 불투명한 절차 속에서 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면서 “중국은 투명성이나 역내 협의가 거의 없이 모호하고 수상쩍은 거래를 하는 패턴이 있다”고 지적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2월 국무장관으로는 36년만에 피지를 방문해 14개국과 화상회의를 했다. 백악관은 3월 조셉 윤 전 대북특별대표를 태평양 도서 특사로 임명했다. 지난달에는 코트 캠벨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을 중국과 안보협력을 체결한 솔로몬제도에 파견해 중국 군 기지가 건설될 경우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왕 부장의 남태평양 방문에 맞춰 페니 웡 호주 외교장관도 26일 피지를 방문했다. 웡 장관은 태평양 도서국가들의 협의체인 태평양제도포럼(PIF) 사무국에서 “호주는 태평양 국가들을 예속하지 않는 파트너”라며 “지속 불가능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기후위기, 인권,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중국 외교정책에 남태평양 국가들이 갖는 불안감을 겨냥했다. 호주는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였지만 스콧 모리슨 총리 시절 주변국에 신뢰를 잃어 왔다. 해수면 상승 등 기후위기가 태평양 국가들의 가장 심각한 현안이었지만 기후위기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샬군도, 팔라우, 키리바시, 투발루의 전 지도자들은 지난 4월 미국과 호주를 비롯한 중국 견제에 매달리는 강대국들을 향해 “태평양 국가들의 가장 큰 위기는 중국의 위협이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비판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태평양 국가들에서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함께 나오고 있다. 강대국들의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가 확대될 것을 기대하는 군비증강이나 경제적 예속에 대한 우려도 높다. 데이비드 파누엘로 미크로네시아 대통령은 중국의 남태평양 전략에 대해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위험한 대목이 많다”며 “중국이 태평양 지역의 어업 및 통신인프라를 소유하고 e메일 기록을 들여다 볼 우려가 있다”고 다른 태평양 국가 정상들에게 8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내 협정에 승인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고 디플로맷이 전했다. 파누엘로 대통령은 “협정은 최악의 경우 세계대전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도 왕 부장의 남태평양 순방이 결정되자 “기후 적응이나 완화 등 공통된 관심사를 지닌 분야에서 협력하는 건 좋다. 하지만 역내 군사화와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뿐 아니라 미국·호주 역시 군비경쟁을 부추긴다고 비판받는다. 타네티 마마우 키리바시 대통령은 지난해 오커스 결성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과거 프랑스가 태평양 지역에서 핵실험을 했던 사실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산드라 타르테 피지 남태평양대 교수는 “태평양 도서 국가들은 해당 지역에서 서방과 중국 간 경쟁이 심화되는 것에 ‘혼합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파트너 선택지가 많아졌고 협상력은 더 강해졌지만 원치 않는 긴장과 군비 증강의 위협에 대한 우려도 지역 전역에 있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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