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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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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老子) 38월은 속알줄(德經)의 첫 글월이다. 길줄(道經) 끄트머리 37월의 마음자리(心地)는 그 글월 첫줄에 쓰인 “길은 함없어도 늘 아니하는 게 없”이다. 함없이 늘 하는 게 길이란 이야기다. 없이 하시는 님이요, 그 님이 바탈(性)과 일름(命)의 알짬(精)으로 솟아 참나(眞我)를 깬다. 속알줄의 꼭지마음(核心)도 다르지 않다. “높속알(上德)은 함없고 라함없”는 얼숨(靈氣)이기 때문이다.


얼숨은 검얼(神靈)의 숨돌(氣運)이다. 집집 우주의 모든 잘몬(萬物)을 산숨(生氣)으로 짓고 일으키는 그 숨돌. 이 숨돌이 어떤 일을 만나도 꿰뚫어 밝히고 또 아는 힘을 솟나게 한다. 크고 큰 슬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앞에서 ‘높속알’이라 했듯이 속알은 ‘얕속알(下德)’도 있다. 속알은 높속알과 얕속알로 두 갈래다. 얼숨이 비어 빈 빈탕의 속알로 가득가득 있으면 높속알이요,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범벅이 뒤섞여 마음보가 얇아지면 속알은 없다. 그야말로 소갈머리 없는 놈이다. 높오르는 속알은 아예 속알을 기대하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으니, 오히려 속알이 텅 비어서 시원시원하게 가득가득 있다. 얕내리는 속알은 속알을 놓지 않고 거기에 기대고 기대하니, 시원하게 비어 빈 빈탕의 속알은 아예 없다.


경향신문

속알이 길을 바짝 따른다고는 하나, 사실 다 큰 속알이 바로 길이라는 얘기도 되지. 속알이요, 길이라고 달리 부르지만 그것은 달리 부르는 ‘하나’인 셈이거든. 닝겔, 밀월, 종이에 수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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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알은 맨 처음의 없꼭대기(無極)로 높오르는 스스로 저절로의 텅 빈 참 움돌(生生化化)이요, 참 숨돌이다. 스스로 저절로 돌아가니 참 움돌은 ‘함없’이요, 또 무언가 하라는 ‘라함없’으니 걸릴 것도 없다. 하라함 없이도 세상의 잘몬은 잘도 돌아가고 집집 우주의 길도 뻥 뚫렸다. 속알은 씨알과 같아서 그 작고 작은 속에 이미 산일름(生命)의 우주가 다 있다. 제절로 깨 캐내 높높이 높올라 열매 맺고 영글어 터지는 그 숨돌의 힘 찬 속을 보라!


노자 늙은이 21월에서 “다 큰 속알의 얼골은, 오직 길, 밭삭 따름.”이라고 했다. 속알 키우는 것이 길 따르는 삶이다. 다 큰 속알의 얼굴은 오직 길이요, 그 길 바싹 따르는 일이다. 바투로 다붙어 밭아야 속알이 빛난다. 오직 옳고 바른 올바른 길을 따라야 텅텅 비어 빈 속알의 시원한 큰 얼굴이 된다. 글월을 풀면서 늙은이는 이렇게 말했다 : “속알이 길을 바짝 따른다고는 하나, 사실 다 큰 속알이 바로 길이라는 얘기도 되지. 속알이요, 길이라고 달리 부르지만 그것은 달리 부르는 ‘하나’인 셈이거든. 다만 속알이 길을 따르니 길은 비롯의 ‘비(없:無:虛)’요, 속알은 비롯의 ‘롯(있:有:實)’이라고 할 수 있지. 있없 번갈아 도는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살펴야 돼.”


자, 그럼 38월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경향신문

큰 강이 흐른다. 강줄기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주검을 태운다. 불이 치솟으며 푸르스름한 연기를 길게 내 뱉는다. 불 끝에서 연기가 소용돌이친다. 저녁노을이 지는 강의 하늘은 불그스레하다. 그 불그스레한 하늘로 연기가 솟아서 둥둥 떠간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종소리가 울리고, 여기저기서 우는 노래가 떠가는 연기를 좇는다. 바글바글, 웅성웅성, 어디선가 아우성이 번지고 그 소리들 틈바구니 뚫고 떠돌이와 깨달이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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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 높오르는 속알은 속알에 기대지 않으니 속알이 있지. 속알 놓아야 비로소 속알이 솟거든. 속알이 솟은 자리는 텅 비었으나 얼숨의 숨돌이 돌아가는 빈탕이야. 얕내리는 속알은 속을 놓지 않으니 싶음이 들어찬 속이야. 속알 없지.


깨달이 : 하고잡, 하고픔, 싶음(欲)이 끼어들면 속알은 속알 놓지 않으려고 야단이야. 속알 없는 짓이란 걸 몰라. 가만 가만히, 맑고 고요하게, 없꼭대기로 속알이 높올라야 속알이 보이지. 하늘일름(天命)의 얼줄이 내려 닿은 씨알 속 바탈(性)인 온뿌리제꼴(本來面目)을 보는 거야.


떠돌이 : 다석은 올라가 올라가라고 했어. 올라가다가 ‘나 무던히 올라왔지?’ 하지 말고 더 더 올라가 올라가라는 거야. 하느님 아들 되는 지경까지 올라가라는 거지. 그렇게 올라가 올라가면 아버지를 머리 위에 모시게 되는데, 그때 그 자리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크게 벌려놓으신 우주 속이나 우주 밖이나 그만큼, 우리가 하느님아버지 나라에 돌아갈 거라는 거야. 속알 놓고 높오르니 속알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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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이 : 그래. 그래서 높속알은 스스로 저절로 오르니 함없고(無爲), 하라는 라함없어(無以爲). 그런데 얕속알은 달라. 하고(爲) 하라는 라함이 있거든(有以爲). 높사랑(上仁)은 하되(爲) 하라는 라함없고(無以爲), 높옳(上義)은 하되(爲) 하라는 라함이 있지(有以爲). 게다가 높낸감(上禮)은 하라고 해서 말 안 들으면 팔을 끌어다 그대로 치르기도 해.


떠돌이 : 높속알(上德), 얕속알(下德), 높사랑(上仁), 높옳(上義), 높낸감(上禮)으로 바꾼 우리말이 참 아름다워. 그 말들의 몸짓 맘짓에 함없고 하라는 라함없으며, 하고 하라는 라함이 있는 뜻도 슬기로워. 함(爲), 함없(無爲), 라함없(無以爲), 라함있(有以爲)의 뜻말도 잘 알아서 받아내니 재미가 있고. 높낸감의 낸감은 감(制) 낸 걸 말해. 큰 감은 통째로 쓰지 썰어서 쓰진 않아. 그런데 그걸 내어 쓰면 낸감(禮)이 되는 거야. 낸감도 아니고 높낸감인데 하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니 팔을 잡고 끌어다 그대로 높낸감을 치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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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이 : 다 큰 속알의 얼굴은 오직 길이요, 그 길 바싹 따름이야. 속알 키우는 게 길 따르는 삶이고. 바투로 다붙어 밭아야 속알이 빛나지. 속알이 길을 따르니 길은 비롯의 ‘비(없)’요, 속알은 비롯의 ‘롯(있)’이라고도 했어.


떠돌이 : 그러니 길 잃은 뒤에 속알 보이고, 속알 놓친 뒤에 사랑 보이고, 사랑 잃은 뒤에 옳 보이고, 옳 얽힌 뒤에 낸감 보여. 높낸감이 아닌 낸감은 맘속(忠) 맘믿(信)의 얇고 얇은 얄팍얄팍이오, 어질어질의 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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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이 : 속알 보이고, 사랑 보이고, 옳 보이고, 낸감 보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데에 서 있는 이는 자기가 길의 꽃(道之華)인줄 알 터. 바로 그것이 어리석의 비롯이란 걸 모르고 하는 생각이지. 그래서 사나이(산아이)는 두터운 데로 가지 얇은 데로 가지 않아.


떠돌이 : 길의 꽃이 어리석의 비롯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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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이 : 사나이는 열매를 맺지 그 꽃을 볼라 하지 않거든! 그러므로 이를 집고 저를 버리지. 집어야 하는 이는 열매요, 두터운 데이고, 맘속, 맘믿이야. 버려야 하는 저는 홀리는 꽃이요, 얇은 데이고, 낸감, 얄팍얄팍이지.


떠돌이 : 속알도 놓고, 뜻도 놓고, 일을 이루려는 마음도 놓고, 자기를 높이려는 싶음도 놓고, 저 잘난 척에 빠지는 제뵘도 놓아야 높속알에 오르겠어. 자, 그럼 38월도 새로 새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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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배,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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