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6·25 전쟁 직후 북녘 교회 모습 채록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한국 가톨릭교회 최고령 주교인 윤공희(98) 빅토리노 대주교가 젊은 시절 경험했던 북녘의 교회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최근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출간한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는 윤 대주교의 기억과 경험에 근거해 1930년대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북한 교회의 모습을 담았다. 어린 시절 윤 대주교가 어엿한 사제로 커나가는 성장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평양교구 두 번째 본당인 진남포(현 남포) 본당에서 어린 빅토리노가 복사를 서던 여덟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진남포는 전시 동원체제에서 군사 전진기지가 되며 신흥도시로 급변했다.
진남포 성당은 교세가 확장했고, 선교회인 메리놀회가 평양교구에 진출하면서 이 성당에 외국인 신부가 부임했다. 어린 빅토리노는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학교를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부님을 보며 사제의 꿈을 키웠다.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덕원신학교 시절에는 일제 치하에서 해방을 맞으며 누렸던 찰나의 기쁨, 이후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정권 수립으로 겪게 되는 수난사가 그려진다.
윤 대주교는 당시 북한 정권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종교 탄압도 시작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밤중에 수도원 주교 아바스와 교장 신부, 수도자들이 연행되고, 이어 덕원신학교 강제 폐쇄 명령이 떨어지며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그는 1950년 1월 목숨을 걸고서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온다.
윤 대주교는 서울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사제품을 받았고, 신부 생활을 시작할 무렵 6·25전쟁을 겪는다. 이때 인민군 군의관이 돼 내려온 형님에게 강복을 주고, 9·28 서울 수복 전까지 공소에 피신하기도 한다. 북한군이 밀리면서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교구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일도 기록했다.
책은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윤 대주교가 있는 광주가톨릭대 주교관에서 진행된 여덟 차례 인터뷰를 토대로 서술됐다. 구술작업 과정에서 녹취록을 만들고 다시 글 언어로 풀어 각종 사료와 논문을 더해 완성됐다.
글은 자유기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권은정 작가가 풀었다.
윤 대주교는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를 수료했다. 해방 이후 월남해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963년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되며 주교품을 받았다.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되며 대주교로 승품했다.
344쪽. 1만8천 원.
edd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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