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천년 달빛, 월성 ① 신라 왕궁의 라이프 스타일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
오랫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월성은 왕이 거처한 왕궁이 있던 핵심적인 공간입니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UNESCO)가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는데요.
경주의 중심 유적이자 전 세계가 소중히 여기는 월성, 과거 월성에서 신라왕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경주 월성으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신라왕이 살던 곳은 어디?
월성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나옵니다.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또는 재성이라고 불렀는데" - 『삼국사기』 잡지 지리
특히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월성'이라 지었고, 그해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 월성은 실제로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라의 궁성 역할을 담당하게 된 월성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제 기능을 수행했죠.
신라의 왕궁이 월성과 그 주변 공간으로 확대되는 변화가 있었지만, 줄곧 월성을 중심으로 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계속 같은 곳에서 지냈을까?
사실 월성이 신라의 궁궐터가 되기 전엔 금성(金城)이 왕궁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월성이 들어선 후 금성과 함께 왕궁의 역할을 나누어 맡다가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점차 월성이 실질적 왕궁으로 자리 잡은 것이죠.
475년~488년에 명활성으로 옮겨 간 기간을 제외하고, 신라왕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월성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금성'은 문헌에서만 전할 뿐, 아직 실체가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왕이 남긴 흔적, 월성은 '재성(在城)'으로도 불렸는데요.
재성은 '겨신(在)+성(城)'이라는 이두 표현으로 왕이 '계신 성' 즉 왕궁을 뜻하는 신라 말입니다.
월성에서 출토된 기와에도 '임금이 계신 성'이란 뜻을 가진 '재성(在城)'이란 글자가 등장합니다.
한편 종이가 보편화되기 전에 널리 쓰이던 목간(木簡)은 나무를 가공하고 그 위에 글자를 쓴 유물입니다.
주로 월성과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데요. 행정문서 또는 물품을 주고받은 송장(送狀)의 역할을 했습니다.
목간을 통해, 월성과 그 주변에 관청이 있었고 정치·행정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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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의 또 다른 이름?
월성은 전체적인 모습이 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반월성(半月城)'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고려·조선 시대 역사서나 지리서와 문학작품에 '반월성'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신라 왕궁의 숨은 이야기?
한편 월성에 황새와 개가 등장하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요.
41년(350) 봄 3월 황새가 월성 귀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35년(736) (중략) 개가 재성의 북이 달린 누각 위에 올라가 3일 동안 짖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이처럼 월성 안에 동물들이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성은 왕이나 관리들의 정치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곳이었죠.
동궁과 월지,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지 등 세계유산을 비롯해 소중한 문화재가 모여 있는 신라 천년의 경주.
'지붕이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그곳에는 신라의 왕궁, 월성이 있었습니다.
신라인들이 작성한 또 다른 실록, 신라의 궁궐 라이프로 살펴봤습니다.
따뜻한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지금, 경주 월성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유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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