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랄의 탄생
루터가 류트를 연주하면서 가족과 함께 코랄을 노래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롤모델처럼 회자되는 그림이다. 루터는 마흔두 살이던 1525년, 26세의 파계한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장남 한스, 장녀 엘리자베스에 이어 막달레나, 마르틴, 파울, 마가레테를 낳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떴다. 화면의 오른쪽 테이블에 앉은 인물은 루터의 동지이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인 필리프 멜란히톤이다. 독일의 화가 구스타프 슈팡엔베르크가 1875년(추정) 그린 상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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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자 레오 10세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지난 회에 언급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이었다. 뚱뚱하고 시력이 안 좋았으나 머리 회전은 빨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렌초는 차남을 성직자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 교회에 봉헌했다. 아이가 일곱 살 때였다. 적장자에게 가문의 수장 자리를 잇게 하고 차남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은 당대의 명문가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로렌초의 주도면밀한 계획은 그 이상을 원했다. 메디치 가문이 세속과 교회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 다시 말해 양손에 떡을 들려는 야심이었다. 고조부의 이름을 이어받아 ‘조반니’로 불렸던 차남은 고작 열네 살이던 1489년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됐으며 3년 뒤 승격해 로마의 추기경단에 입성했다. ‘메디치’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1513년 3월11일, 바티칸의 콘클라베(Conclave)는 마침내 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피렌체의 시민들은 열광했다. 폭죽을 터뜨리며 나흘간 축제를 벌였다. 술 취한 사내들이 거리를 몰려다니며 “파파 레오네!”를 외쳐댔다.
레오 10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예컨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1536)는 그를 친절하고 인간적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호평했다. 물론 이는 ‘전쟁 교황’으로까지 불렸던 전임자 율리우스 2세의 호전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에라스무스는 레오 10세가 보여줬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장려, 다분히 쾌락주의자였던 면모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교황을 ‘엄숙하고 경건한 지도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의 교황들에게 이런 잣대는 의미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레오 10세는 ‘인생을 즐기자!’를 모토로 삼았다. “낙천적이고 오락을 좋아하고 가문 특유의 능력을 소유했으나 고통을 피하려 했다”(G. F 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한량 기질’이 다분했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의 평가는 참고할 만하다. “최초의 이탈리아어 비극이 공연된 것은 그의 앞에서였다. 최초의 이탈리아어 희극도 마찬가지였다. 레오의 연회장과 미술관, 예배당은 라파엘로가 만든,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는 음악에 열광했다. 궁에서 음악이 들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로마교황사>)
‘꽃의 도시’ 피렌체에 비한다면 로마는 폐허의 쓸쓸함이 감도는 도시였다. 과거는 찬란했으되 현재는 황폐했다. 그곳에 다시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레오 10세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던 반면에 예술에는 완전히 몰입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 있었다. 가문의 재력뿐 아니라 교황청의 재산까지 온전히 그의 수중에 있었다. ‘한량 교황’은 메디치의 후손답게 수많은 예술가들을 로마로 불러들였다. 로마를 예술로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율리우스 2세 때 시작됐지만 레오 10세는 더욱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언급했듯이,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드디어 라파엘로가 로마에 상주하면서 교황을 위해 능력을 제공했던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 로마의 문예부흥은 막을 올렸고, “레오 10세 치하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거의 전적으로, 라파엘로는 상당 부분을 바티칸을 위해 일했다. 특히 레오 10세가 끔찍히 아꼈던 예술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라파엘로였다. 레오 10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던 화가는 라파엘로뿐이었다.
돋보기를 썼던 미식가, 탐미주의자, 거의 모든 장르의 예술을 애호했던 레오 10세는 교황청을 치장하는 것 외에도 도로망을 확충하고 성당을 재건축하기 위해 금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프로젝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이었다. 당시의 대성당은 지어진 지 1000년이 넘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역대 교황들이 비용 탓에 망설였던 재건축을 율리우스 2세가 시작했고(1506년), 그 프로젝트는 레오 10세에게로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탐미주의자의 욕망이 불타올랐다. 엄청난 역사(役事)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며, 결국 교황청의 금고는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지 않을 줄 알았던 화수분이 ‘돈 가뭄’의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레오 10세는 이 지점에서 특단의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이며 파렴치했다. 그는 ‘면벌부’(Indulgentia)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
망치를 든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면벌부를 비판하는 95개조를 게시하고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페르디난트 포웰스가 1872년 그린 상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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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라이벌’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하나의 드라마로 바라보면서 대립되는 두 인물을 돋을새김하는 수사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레오 10세의 라이벌은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독일의 소도시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난 루터는 레오 10세보다 여덟 살 아래다. 원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22세 때 삶의 방향을 바꿨다. 1505년 7월 초순, 부모를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오다가 엄청난 천둥과 폭풍우를 만났고, 두려움에 떨던 루터가 성 안나(마리아의 어머니, 예수의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 루터는 수도자의 삶을 서약했다. 물론 진위를 확인하긴 어렵다. 루터의 전기나 평전 어디에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왠지 과장된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경험했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와도 구조가 흡사하다. 하지만 ‘꾸며낸 스토리’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짐작컨대 그는 이미 수도자의 삶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루터가 집에 머물면서 부모에게 자신의 염원을 털어놨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심한 언쟁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면벌부의 역사는 길다. 11세기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를 활용했다. 면벌을 받을 수 있는 보속 행위는 자선이나 적선,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 등으로 다양했다. 초기에는 나름의 진정성도 있었다. 돈을 내놓는 행위를 뛰어넘어, 고백자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야 사제는 죄를 용서했다. 하지만 14세기에 들어서면서 금전 거래의 성격이 짙어졌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면벌부를 살 수 있다는 허가였다.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 재위)는 연옥에서 고통받는 죽은 친척의 처벌을 감해주는 면벌부를 공식화했고 이는 교황청의 막대한 수입으로 이어졌다. 교황청은 그런 자금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겼고 전쟁을 치렀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레오 10세가 판매했던 면벌부는 악명 높은 사례로 손꼽힌다. 한꺼번에 수천장, 많게는 수만장씩 면벌부를 찍어냈는데 이는 진보한 인쇄술 덕택에 가능했다. 구덴베르크가 마인츠에 인쇄소를 열었던 때(1448년)로부터 50여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이제 유럽의 대도시 어디에나 인쇄소가 있었다. 심지어 구텐베르크도 면벌부 인쇄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종교개혁과 코랄(Choral)의 탄생
루터의 종교개혁 발발지인 비텐베르크 교회. 프리드리히 현공이 비텐베르크에 신도시를 건설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독일어로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 영어로 옮기면 Castle Church)로 불린다. 예배뿐 아니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강의실로도 사용됐다. 애초에는 성당이었으나 1524년에 루터교 교회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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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져 있듯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교회(Schlosskirche)의 정문에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게시했다. 망치를 손에 든 루터가 못질을 하는 모습이 여러 점의 회화로 전해진다. 물론 실제로 그랬는지는 미지수다. 모두 훗날의 그림들, 말하자면 상상화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루터가 95개 논제를 소량이나마 인쇄해 배포했다는 사실인데, 당시 그는 이 유인물의 파괴력을 미처 짐작하지도 못했다. 불과 8주 전에도 스콜라 신학을 반박하는 논제를 배포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5개 논제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아마도 ‘면벌부’를 콕 집어 거론했기 때문일 것이다.
95개 논제의 파괴력을 예감한 인쇄업자들은 부지런히 인쇄기를 돌렸다. 면벌부 인쇄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팸플릿 인쇄 쪽으로 사업 방향을 급선회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격정적이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구사했으며 글을 매우 빨리 썼던 루터는 단박에 유명인사가 됐다. 95개 논제 외에도 그의 수많은 문건과 저서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루터는 평생에 걸쳐 약 30권을 저술했으며, 이들 책자는 인쇄본으로 약 30만부나 유통됐다. 1520년 간행된 <독일 귀족에게 고함>은 초판 4000부를 찍고 그해에만 16쇄를 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1년간 19쇄를 찍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였다. 이제 ‘역사’라는 무대에서 배우의 역할이 바뀌었다. 레오 10세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루터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로 자리매김했다.
쾌락주의자였던 레오 10세는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 음악에 빠졌다. 물론 그것은 예술의 변치 않는 속성이다. 루터는 달랐다. 일단 그는 다른 종교개혁가들, 이를테면 츠빙글리와 칼뱅처럼 예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문학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신학의 시녀”(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혹평했으며, 특히 조형예술을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음악은 예외였다. <음악에 관하여>라는 미완성 팸플릿에서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에 둔다”라고 썼던 루터는 교회에서 다성음악을 노래할 때 테너 파트를 맡았고 류트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음악이란 쾌락이 아닌 믿음의 도구였다. 교회의 회중이 한목소리로 바치는 신앙고백이었으며 종교적 가르침의 수단이었다.
루터는 예배 형식을 대폭 바꿨다. 사제가 아니라 신자들 중심으로 개혁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교회에서 노래할 수 있는 이는 사제와 성가대원뿐이었다. 가사는 라틴어였다. 하지만 루터는 독일어로 쓴 코랄(Choral,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을 적어도 37곡이나 작곡해 회중이 한목소리로 노래하게 했다. ‘코랄’이라는 명칭은 회중이 함께 부르는 ‘합창’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이후의 음악사에서 코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특히 루터교를 받아들인 중북부 독일에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루터가 확립한 새로운 교회음악의 전통은 100년쯤 뒤의 작곡가 하인리히 쉬츠(1585~1672), 또 그로부터 100년쯤 뒤에 활약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에게로 이어졌다. 알려져 있다시피 바흐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다. 약 200곡이 전해지는 그의 교회 칸타타들이 코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당연했다. 루터가 작사·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바흐의 칸타타 80번의 첫번째 합창으로 등장한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쯤 뒤에는 멘델스존(1809~1847)이 종교개혁 300주년을 맞아 작곡한 교향곡 5번의 4악장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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