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역대 7차례 대선에서 단일화 이슈는 매번 주요 변수로 작용하며 후보들을 웃고 울게 만든 바 있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연합을 창당해 대선에 다시 도전했다. 김대중 당시 후보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1997년 11월 3일 이른바 'DJP연합'으로 불리는 대선후보 단일화에 극적으로 합의하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반면 보수진영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3김시대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출마한 민주당 조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내며 맞섰다. 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호남과 충청, 진보와 보수가 연대한 'DJP연합'에 힘입어 이회창 총재를 꺾고 대선 도전 4수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진보·보수 연대인 데다 대세론을 뒤엎은 결과여서 역대 단일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반대로 단일화는 막판에 깨졌지만 결과적으로 단일화 무산이 되레 '반사효과'로 작용한 사례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들어낸 2002년 16대 대선이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줄곧 약세였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D-24일 조사에서 단숨에 지지율 43.5%로 첫 역전을 이뤘다. 정 후보가 대선 하루 전날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하면서 단일화는 사실상 깨졌지만, 정 후보의 지지 철회가 진영 결집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대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하게 됐다. 반대로 2012년 18대 대선의 경우는 야권이 후보 단일화를 했는데도 패배한 사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갈등을 겪다가 11월 23일, 안 후보가 갑자기 전격 사퇴하는 형식으로 후보가 단일화됐다. '절반의 단일화'는 결국 안 후보 지지자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18대 대선은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렇듯 역대 대선에서 단일화가 톡톡히 승리의 구심점이 된 경우, 단일화 무산이 승리로 이어진 경우, 단일화하고도 효과가 사라진 경우 등 다양한 결과를 나타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당장 선거에서는 초박빙 상황에서 윤 후보에게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과거 합의 내용이 분명했던 DJP연합도 대선 이후 결국 깨졌다"며 "합의가 지켜질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용 기자 /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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