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연구자가 쓴 신간 '에도시대 도시를 걷다'
일본 교토 기요미즈데라(淸水寺)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이 17세기 이후 일본에 파견한 조선통신사는 배편으로 오사카까지 간 뒤 오사카부터 오늘날 도쿄인 에도(江戶)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경제도시 오사카와 실권자인 쇼군이 있는 정치도시 도쿄 사이에는 교토와 나고야라는 대도시도 있었다. 교토에는 일왕이 머물렀고, 나고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재건한 성이 있었다.
신간 '에도시대 도시를 걷다'는 문학 연구자 김경숙 박사가 조선통신사 기록을 바탕으로 오사카, 교토, 나고야, 도쿄의 옛 모습을 복원한 책이다.
저자는 오사카를 '물화의 부고(府庫·곳간)', 교토를 '왜황(倭皇)과 불교의 공간', 나고야를 '종실의 식읍(食邑)', 에도를 '관백(關白)의 공간'으로 각각 규정한다. 왜황은 일왕을 뜻하고, 관백은 막부(幕府)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사신들은 대체로 오사카의 형세가 좋다고 평가했다. 17세기 문인 남용익은 "먼 산이 빙 둘러 벌려 서 있어 형세가 아주 뛰어났다"며 "돛대가 바다를 덮어서 옹기종기 수풀과 같았다"고 했다. 임광도 1636년 "돛을 단 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고 놀라워했다.
오사카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저자는 신유한이 1719년에 쓴 "히데요시가 오사카에 살면서 싸움을 즐기고 사치하고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 욕심을 채웠다"는 글을 소개한다.
조선 문인들은 권력이 거의 없는 일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저자는 "일왕이 궁궐 속에서 실권 없이 사는 것에 대해 사신들은 허수아비, 시거(尸居·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음)라고 표현했다"고 짚는다.
18세기 인물인 원중거는 "일왕을 끼고 쟁탈을 도모하는 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묻고는 "저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변방의 교활한 무리가 반드시 기회를 타서 우리 땅을 노략질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에도 막부가 무너진 뒤 일본은 한국 침탈을 시도했다.
나고야에서 사신들은 경제를 주의 깊게 살폈다. 특산품인 긴 창과 잘 드는 칼, 소금에 관심을 보였다. 원중거는 오사카, 교토, 에도보다 나고야에 아름다운 여성이 많다고 기록했다.
조선통신사의 목적지였던 에도에서 조선 문인들은 특이하게도 화재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예컨대 남용익은 에도에서 통신사 숙소인 관소(館所)로 향하는 길에 늘어선 나무 울타리를 보고 호기심을 품었는데, 불에 탄 집을 수리하지 못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풍속이 거짓되고 미덥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원중거는 에도 인근을 지나면서 "강호에서 구걸하는 무리가 여기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막부가 숨기려 해도 가릴 수 없었던 것인지, 막부의 통제권이 제대로 작동을 못 한 것인지, 굳이 이러한 점을 숨기고자 하지 않았던 것인지, 가능성은 여럿이다"고 설명한다.
소명출판. 332쪽. 2만3천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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