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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우크라이나 위기의 근원…'나토 동진 안한다' 약속 있었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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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wooksik@gmail.com)]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냉전 종식 및 독일 통일 과정에서 소련에게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까? 이 질문은 전운이 감돌고 있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 질문에 해당된다.

이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들이 우리를 속였다. 단호하고, 뻔뻔하게 나토가 확장되고 있다"며 분개하고 있다. 반면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나토는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누구 말이 진실에 가까울까?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국가안보문서고(National Security Archive)가 입수한 비밀 해제 문서들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적해보자. 미국, 소련(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당시 핵심국가들의 문서들은 당시 상황을 면밀하고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먼저 서독의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의 공개 발언이다. 그는 1990년 1월 31일 독일 통일을 주제로 한 공개 연설에서 "동유럽의 변화와 독일 통일은 소련의 안보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며 "나토 동진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주 서독 미국대사관은 겐셔의 제안은 동유럽의 나토 가입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나토의 군사력이 동독에는 주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 역시 2월 초순에 걸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 지도부에게 "나토가 1인치도 동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약속했다. 그는 특히 이 약속은 "나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베이커는 소련 지도부뿐만 아니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에게도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이는 콜이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 통일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사유가 되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교장관도 1990년 4월 11일 고르바초프를 만난 자리에서 "영국은 소련의 이익과 존엄을 해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말했다.

5월 18일에 고르바초프를 만난 베이커는 "우리의 정책은 소련으로부터 동유럽을 분리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도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5월 25일 고르바초프에게 나토 동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군사 블록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바르샤바조약기구는 물론이고 나토도 해소되었으면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5월 30일 워싱턴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소련을 해롭게 할 의도도 생각도 없다"며 "나를 믿어달라"까지 말했다. 정상회담에 동석한 베이커는 나토 확대 자제를 포함한 9가지 보장을 거듭 밝혔다.

10일 후 고르바초프를 만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도 "우리는 소련이 안보를 보장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나토의 개혁 필요성을 언급했다. 군사적 성격을 줄인 '정치 동맹'이 바로 그것이었다.

7월 17일 부시도 고르바초프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와 유사한 입장을 전했다. 독일 통일과 나토의 미래에 대해 "당신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표한 우려를 유념하겠다"며, "우리는 근본적으로 재래식 및 핵무력에 대한 군사적인 접근을 바꿨다"고 말한 것이다. 대처의 후임자인 존 메이어 총리는 소련의 드미트리 야즈노프 국방장관이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묻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프레시안

▲ 25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리비우 시의 필수 산업 및 서비스 인력들이 시 외곽에서 실시된 군사 훈련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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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방 지도자들의 약속을 접한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통일뿐만 아니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하는 것까지 동의했다.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선 말이다.

이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 소련 정부는 1991년 7월 나토 본부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자리에서 만프레트 워너 나토 사무총장은 "우리는 나토의 강화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소련 대표단은 "워너가 나토 확대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 내부에선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국무부는 나토 동진 시도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부시 행정부의 공개적인 입장도, 소련에 약속한 것도 이것이었다. 그런데 국방부가 다른 목소리를 냈다.

국방부는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에 "조금은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훗날 '네오콘'의 핵심으로 불리게 되는 딕 체니였다.

체니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군수산업체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군부-의회-싱크탱크-언론 등을 상대로 광범위하고도 치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미국 외교정책을 '군사화'하는 데에 앞장섰다. 여기에는 나토의 동진과 미사일방어체제(MD)도 포함되었다. '민주주의의 확대'는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남용되었다. 

보다 못한 로버트 게이츠는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어놓고" 이를 밀어붙인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게이츠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중앙정보국(CIA) 부국장과 국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명이었다.

정리하자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냉전 종식 및 독일 통일 과정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소련에게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약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이해와 해법에 큰 함의를 지닌다.

1990년 5월 31일 백악관에서 부시를 만났던 고르바초프는 부시를 비롯한 미국 고위층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소련 인민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심각한 위험이 생길 것이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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